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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해남 우수영과 명량대첩비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있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나 전라우수영의 존재는 그리 널리 알려진 것 같지 않다. 해남에서 진도를 건널 때 왼편에 있는 우수영 국민관광단지가 우수영터로 알고 있었는데, 버스여행을 하면서 우수영관광단지 오른편에 전라좌수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친구와 함께 해남 우수영을 찾았는데, 워낙 작은 마을에 우수영 흔적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마을 입구 손짜장면집이 있어서 수타짜장면을 먹으려고 그곳에 들어갔다.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 작년부터 수타짜장을 접었단다. 아쉬움에 간짜장을 시켰는데, 그것마저 힘들어 안된단다. 대신 그냥 짜장면도 맛있다고 권해서 시장하던 차에 짜장면 하나를 후딱 비우고 나왔다. 주인내외에게 수영성 내력을 물었는데, 바쁜 일손에 경황이 없는 듯해서 무작정 탐사에 나섰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니 한옥 건물과 산 위에 누각이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 없어 우선 가까운 곳 한옥 있는 곳으로 갔다. 좁은 골목길을 조금 지나 거칠게 생긴 암반 위에 커다란 비각이 서있어서, 비각으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명량대첩비가 그곳에 있었다.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3월 이곳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이순신 장군이 해남 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함선을 격침 혹은 격파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사실을 기록했다.  비문은 1686년에 쓰인 것이나 비가 건립된 것은 2년 뒤인 1688년이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했다. 비석은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얹고, 구름무늬와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해서체로 글씨를 썼으며,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횡서로 된 제자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 12자를 써서 1688년 3월에 건립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42년 전라남도 경찰로 하여금 명량대첩비를 철거케 했다. 일제는 높이 2.67미터, 폭 1.14미터나 되는 비석을 500미터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기고 비각은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다.  조선총독부는 대첩비까지 없애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서울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었다.

 

  광복 후 우수영 지역 유지들은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복구하기 위해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소재를 수소문하여 경복궁 뒤뜰에 묻혀있음을 확인하고, 미군정청(美軍政廳) 협조로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는 다시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가져왔다. 1947년 이곳 해남 남쪽 끝 해안지역 학동리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이후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짓기 위해 자금 마련을 위해 풍물패를 조직하여 나주 · 무안 등 8개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고 대첩비 탁본을 수백 장 만들어 여러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에야 비각이 완공되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동안 해남 충무사 경내에 있던 비석과 비각은 2011년 3월 본래의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왔다. 해남 명량대첩비는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다.      <다음 백과 발췌, 해설사 김기선씨 구술 참조> 

 

 

  명량대첩비 비각

 

  비각을 살펴보고 있는데, 우수영에 사시는 문화해설사 김기선씨가 대첩비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우수영성 지휘소인 망해루까지 손수 안내하셨다. 

 

  비각 옆에 건립한 충무공 사당 충무사

 

  충무사에서 바라보는 대첩비

 

  명량대첩비각

 

  김기선씨 안내로 마을길을 굽이굽이 지나 망해루로 향했다. 망해루로 오르는 길. 소나무 뒤 언덕은 해남 우수영성 토성의 흔적이다. 

 

  우수영성 토성벽과 이정표

 

망해루로 오르면서 바라보는 우수영 성안 마을과 명량해협

 

  망해루로 오르는 산길

 

  망해산 정상 위에 있는 망해루

 

  망해루 누각 위에 올라 성안 마을을 조망했다. 망해산 정상의 망해루에서는 사방이 탁 트여, 지휘소 겸 장대로 쓰였다.  주변에 웃자란 나무들을 베어내면 명량은 물론 서북쪽 바다가 한눈에 보일 터이다. 

 

  망해루 북쪽 전경

 

 토성의 오른쪽 끝자락에 성문인 동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수영 부두에서 바라보는 명량.

 

  우수영 부두의 판옥선과 거북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입으로 충무공을 떠받들지만, 명량대첩비가 있는 우수영성 마을 하나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었다. 일제에 의해 없어질 뻔했던 대첩비를 해남 우수영 주민들의 노고로 되찾아 세운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우수영 사람들과 명량해전의 업적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서라도 우수영성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더운 날씨 우수영성을 안내하고 설명해 주신 김기선 님께 감사드린다.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은 대한민국의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명량대첩의 배후기지였던 역사적 유적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에 있는 당시 무안(務安)의 대굴포(大掘浦)에 있었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1440년(세종 22)에 해남의 황원곶(黃原串)으로 이동하여, 1464년(세조 10)에 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2,484척이고 옹성(甕城:)이 4개, 연못 하나와 우물 2개가 있다고 하였다.  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낮아지는 해안 구릉에 축조되어 남쪽은 석축이고, 북쪽은 토축으로 되어 있다. 남벽은 민가 사이로 남아 있으며, 북벽 토성은 높이 약 3m이고 길이가 약 400m가 남아 있다.  성의 북서쪽으로는 망해산(望海山)이 있고 여기에도 토축의 성벽이 있다. 4개의 문은 터만 있고 북문지가 확실히 남아 있다. 성안에는 1724년과 1752년 및 1804년에 세운 우물 건립비와 중수비가 있다. 전라우수영은 199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6년 사적 제53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전라우수영의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으로 울돌목이 있다. 그 안쪽으로 양도(洋島)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편, 외부로부터 시선을 가려주고 있는 천혜의 요새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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