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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진도 벽파진 전첩비

  벽파진은 고려 후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긴 후,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16일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수군을 정비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였다. 벽파진 나루 바위 언덕에 1207년(고려 희종 3년) 벽파정이 세워진 뒤,  1465년(조선 세조 11년) 중건됐지만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흔적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진도군은 2016년 사업비 5억 원을 들여 정면 가로 11.1m(5칸) 측면 세로 6.3m(3칸) 크기로 고려시대 양식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로 복원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벽파정이어서 정자 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다. 정자 위, 반 칸짜리 방이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순신 장군이 글씨를 쓰는 모양의 밀랍인형이 있었다. 글씨에는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아남는다.'라는 "死卽必生"이 쓰여 있었다. 정자 위의 방을 자물쇠로 잠글 것이 아니라 개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던 충무공 정신은 개방하여 널리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벽파정 수십 보 언덕 위에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있다. 

 

  이충무공 전첩비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956년 건립한 것으로 노산 이은상의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예전에 본 전첩비였지만 조선조에 건립된 것으로 내내 기억하고 있어서, 망각의 무지를 깨우칠 수 있었다. 

 

  노산 이은상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구금되었고, 1945년 사상범 예비 검속으로 구속된 후 철창 속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1949년 동국대 교수로, 이후 충무공 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통일촉진회 최고위원, 전두환 정부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언론, 사학, 문학 쪽에서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난중일기를 초역하는 등 충무공 이순신 연구자로서도 명성이 높다. 이은상은 추무공 연구에 독보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승만 정권 이후  친독재 전력이 뚜렷하여 논란 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당선을 돕는 문인 유세단에서 활동하였고, 이어 박정희 유신정권·전두환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등 반민주 정권에 협력적이었다. 한 순간의 영화보다는 충무공처럼 길이 남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충무공연구가가 몰랐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과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무공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던 것은 독재자들이었다. 조선조 임금보다 큰 사당을 짓고는 성역화한답시고 마을 사람들을 내쫓는다고 충무공 정신이 더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은 임금에게 불신당하며 고신을 당하면서도, 백의종군하여, 패잔병의 병력으로 명량대첩을 이루고, 왜적 소탕을 위해 노량에서 초개같이 목숨을 바치신 성웅으로, 애시당초 정치군인이 아니었다.      

 

 

  벽파정과 충무공 전첩비

 

  복원된 벽파정에 이르는 돌계단은 자연 암석을 쪼아내어 만든 것이었다.

 

  벽파정 건립문과 이충무공 전첩비

 

  거북 비석 받침은 암석을 통채로 쪼아 만든 것으로 벽파나루를 향해 나가는 형상으로 장엄하며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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