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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원전 1300년전 미케네

  신화와 서사시 속에 등장하는 미케네 왕 아가멤논, 아가멤논이 통치했었다는 곳이 내가 미케네에 대하여 알고 있던 전부였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스, 헥토르, 헬렌, 페리스의 이 이야기는 브레드 피트가 '아킬레스'로 출연한 영화 '트로이'로 재연되었었다. 몇 년 전 터어키에 갔을 때, 볼 것 없다던 트로이에서 기원전 천년이 넘는 시대 영웅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감격했었다. 수많은 천재지변과 풍상으로 옛날 바다와 전장터도 볼 수 없었지만, 가슴속에 몰려드는 벅찬 감동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었다. 트로이를 망하게 한 것은 미케네 왕 아가넴논의 야심 때문이었다. 그는 동생의 복수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복심은 토로이 정복으로 챙길 경제적 이익이었다. 그 결과, 트로이는 멸망하고, 미케네는 승리했지만, 아가멤논 역시 귀국길에 살해당했고, 트로이에서 탈출한 트로이 왕족 아이네이아스 후손 로물루스가 세운 로마에게 그리스는 정복되었다. 고대인들이 짜 맞춘 듯한 역사의 퍼즐은 어느 한 편에 절대적 승리를 주지 않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는 동로마제국으로 분화하여 비잔틴 문명으로 이어져 오늘날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근간이 되고 있음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역사의 순환이다.

   우리는 스파르타와 모넴 바시아의 중간 쯤 되는 '스칼라'라는 작은 마을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느지막하게 미케네로 향해 길을 나섰다. 미케네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 이름이 '메넬라우스'였다. 아마도 형이자 미케네의 왕이었던 아가멤논 식당으로 이름 지었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내 나름 생각해 보았다. 호머의 '일리아드' 속에 아가멤논은 그저 탐욕스러운 왕으로 묘사되는데, 역사 속 아가멤논은 그리스 영웅으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호머루스는 '일리아드'에서 영웅 아킬레스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무용담을 노래했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 왕비 헬렌을 트로이 왕자 패리스가 유혹해서 제 나라로 도망가자, 스파르타 왕 메날라우스가 그의 형인 미케네 왕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요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조직하여 트로이 원정에 나섰다. 아가멤논이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출정했으나, 아킬레스가 사로잡은 미모의 브리세이스 때문에 불화가 생겨 트로이 원정은 성과 없이 10여 년이나 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킬레스의 참전으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함락했다. 그 뒷 이야기로, 아가멤논은 전리품을 잔뜩 안고 귀국했는데, 제 아내의 정부(情夫)인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장성하여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는 자신이 데려다 키운 아이기토스(동생의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 왕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뒤, 왕의 부인인 클리타임 네스트라와 정을 통하여, 귀국한 아가멤논을 죽이고 미케네를 통치했었다. 그리스 신화엔 아들이 부모를 죽이는 것이 다반사며, 아비가 딸을 성폭행하는 일 등, 패륜 행동들이 너무 많아 우리네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다. 형제간의 골육 상쟁, 원한이 복수를 낳고, 그 복수가 또 다른 원한을 불러들인다.  

 

  독일의 고고학자 H 슐리만은 호머의 서사시에 감동을 받아, 1876년 트로이에 이어 미케네 유적을 발굴해냄으로써 신화와 서사시 속의 이야기를 역사시대로 끌어 냈다. 미케네 성과 왕궁은 낮은 산등성이 위에 바위 산을 배후에 두고 튼튼한 외성을 쌓고 그 안에 왕궁을 지었다. 성문에는 돌로 두 마리 사자상을 붙였는데, 사자 머리는 황금으로 장식했다고 전한다. 이곳 미케네에서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은 왕궁엔 황금 장식품 등,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였으며, 도자기에는 인물을 주제로한 무늬들을 처음으로 그려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케네는 BC 2000년경부터 BC 1100년까지 형성되었다. BC 1600년경에는 크레타를 정복한 후, 그 문명을 받아들이며, 발전했던 고대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국가였다. 그들은 크레타인들이 장악했던 해상권을 넘겨받아 지중해 동부를 장악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BC 1200 년경부터 도리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남하해오면서 서서히 붕괴 되어 BC 1100 년경에 완전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BC 8세기경 까지 그리스 역사에 문자로 남겨진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암흑기라 불린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라 자랑하는 우리의 경우, 삼국 시대 유적도 변변하게 남은 것이 없다. 기원전 200 년경 조성된 중국 진시황릉을 보고 그 오래전 역사 유적에 감탄했었는데, BC 1300여전 신화시대 유적이 눈앞에 펼쳐지는 미케네 유적이라니 놀랍기 그지없다. 

 

 

  아트레우스 보물창고, (穹窿墓)의 통칭. 슐리만이 이름을 지었으나 아트레우스 묘가 아니고 아가멤논 묘라고 한다.  B.C. 13 세기 초경 만들었는데, 깎아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첨두종형(失頭鐘形,벌집형)의 무덤이다. 지하 제실(지름 14.5m, 높이 13.2m)과 부속 묘실 및 언덕의 비탈을 파서 만든 연도(羨道, 현실로 가는 길)로 이루어졌으며, 미케네 시대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가이드가 테세우스 묘라고 설명하던데, 안내문에는, 아트레우스 보고라 쓰여 있였다. 가이드 설명은 역시 한계가 있었다. 

 

  보물 창고 안과 출입문, 엎어놓은 깔대기 모양(궁륭형)의 독특한 실내 구조다. 

 

  창고 안,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

 

  보물 창고로 들어가는 길가 가까이, 야트막한 동산 위에 미케네 성과 왕궁 유적이 보였다.

 

  미케네 성 입구

 

  성벽 오른쪽 아래 미케네 유적 박물관

 

  박물관 로비에 있는 미케네 성과 왕궁 모형

 

  궁궐터 모형과 출토 유물

 

  황금 가면, 슐리만은 아가멤논 왕의 얼굴이라고 주장했단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일리아드'에도 아가멤논 얼굴로 소개했었다.

 

  도자기

 

  인형 조각

 

  성문으로 가는 길

 

  성문위의 사자상, 머리는 황금으로 만들어 권위를 나타냈다고 한다. 기원전 13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미케네 성 입구를 지키고 있다.

 

  성안에서 바라본 앞산. 황금 가면의 주인공이 누워있는 모습이란다. 왼쪽이 머리.

 

  정상 위 왕궁터

 

  왕궁터 앞 전경

 

  왕궁터 뒤편 유적지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보는 풍경, 오른쪽 아래가 박물관.

 

 성문 안 원형무덤

 

 

미케네 문명

 

그리스 본토에는 테살리아의 문화로 대표되는 초기 그리스 문화가 있었지만, 북방 산지로부터 남하해온 아카이아 인은 이 선주민을 정복, BC 2000년을 전후하여 본토 남부의 각지에 소왕국을 건설하였다. 미케네 ·티린스 ·오르코메노스 ·필로스 등이 그 주요한 곳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선진문화를 흡수하고 군사력 ·경제력 등을 충실히 하여 본토에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다져나갔으며, 특히 BC 1600년경부터 급속히 그 힘을 증가하여 남쪽 크레타를 대항할 만큼 되었다. 

 

그중에서도 미케네는 가장 강대하여 본토 여러 세력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으며, 특히 크레타의 붕괴 후 지중해 각 지역과의 교류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왕궁은 미케네 문화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낮은 산등성이 위에 바위산을 등지고 구축되었으며, 크레타 궁전의 개방성과는 대조적으로 성새(城塞)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주문(主門)으로서 유명한 ‘사자문(獅子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장려한 궁륭묘(穹窿墓)와 원형의 묘군(墓群)도 성벽 내에 만들어졌으며, 또한 몇 개의 주실(主室)에는 중앙에 노(爐)를 가진 메가론 형식이 확인되기도 한다. 궁전의 벽화 등, 개개의 미술활동에는 크레타 문명의 영향이 분명히 엿보이지만, 전반적인 미케네 미술에는 양식화의 경향이 뚜렷하며, 또한 권위표상성(權威表象性)을 중시한 점에서 크레타 문화와는 매우 다르다. 도기(陶器)의 무늬에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대에 들어서이다.  

 

미케네 문명의 멸망 원인에 관해서는 많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주된 학설은 BC 120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에 도리아인이 남하해오자 이를 막지 못함으로써 붕괴되었다는 설인데, 선형 문자가 해독되면서 도리아인이 미케네 문명 멸망 전에 그리스로 남하했다는 내용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 외 다른 민족의 침입이나 지진, 가뭄 등의 재난을 원인으로 지목한 설도 있다. 미케네 문명이 종말을 고한 뒤, 그리스는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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