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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예산 화순옹주 홍문

  지난 가을 추사고택을 찾았을 때, 보지 못했던 영조대왕이 사랑했던 화순옹주 홍문을 찾았다. 한 모퉁이 돌면 그곳이었는데, 그 걸 몰라 지나쳤던 것이 아쉬웠던 탓이다. 공교롭게도 희뿌연 연무가 끼어 맑은 날이 아니었다. 오랜만의 출사라서 기대가 컸었는데, 결과물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 1758년 1월 17일)는 조선 제 21 대 임금 영조의 차녀로 어머니는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1721) 소생이다.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烈女)로 지정되었으며 이복 언니 화억옹주가 조졸하였기에 장녀가 되었다. 화억옹주와 효장세자는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들과 무당 등이 죽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고, 오랫동안 그것을 효장세자와 화억옹주의 음식에 타 먹였다고 한다. 영조는 비로소 옹주와 효장세자의 죽음이 소론 일당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10살로 요절한 효장세자에게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폐서인 되자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정조대왕이다. 영조대왕은 죄를 짓고 뒤주 안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기에, 세손 이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승계하게 하였다.    

 

  각설하고 화순옹주는 1732년(영조 8) 13세가 되었을 때, 동갑인 김한신(金漢藎)과 혼례를 치렀다.  김한신은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다. 김한신 화순옹주 부처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 김이주(추사의 조부)를 양자로 들였다. 1758년 39세로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었고, 아버지인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아 단식 14일 만인 1월 17일 사망하였다. 영조는 아비의 명을 듣지않은 불효녀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옹주의 조카인 정조대왕은 고모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어 열녀로 봉하고, 열녀홍문을 세웠다.

 

 

추사고택에서 화순옹주 홍문으로 가는 구비, 산 아래 옹주부부의 유택이 있고, 오른쪽 끝부분에 홍문이 보인다.

 

  옹주 부처의 묘와 홍문으로 가는 길에 큰 백송이 한 그루 서서 부부의 살아생전 금슬을 기리는 듯했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영조대왕이 쓴 비문

 

  오른쪽 문인석 얼굴

 

  화순옹주 홍문

 

  홍문 안 집터

 

  홍문 오른편 동산에 백송들을 심어 공원을 만들고, 추사와 관련된 조각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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