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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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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반야산 관촉사 관촉사에 갔을 때마다 비가 왔었다. 그런 연유로 모처럼 맑은 날 일부러 관촉사로 먼 길을 찾아갔다. 관촉사에 도착했을 때 정오쯤이었는데, 관촉사가 북동향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었나 보다. 일주문에서부터 따가운 남쪽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독한 역광이었다. 가능한 대로 역광을 피해 측광을 이용하려 애썼지만 대체로 사진들이 어두웠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륵전 뒤 석탑과 석등은 가림막을 쓰고 보수 중이었다. 모처럼 찾아간 곳이 보수 공사를 하게 되면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관촉사 경내 마당은 맨땅이라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매우 질척거렸다.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을 이어주는 마당길에 야자매트를 깔아 불편을 해소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엔 등산..
겨울 동학사 모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날씨도 제법 푸근해서 동학사를 찾아 걸었다. 동학사 아래 웬 모텔과 펜션, 음식점들이 그리 많은지 깊은 계곡 법당에서 중생들을 구제하실 부처님도 놀라시겠다. 산중 깊은 절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산수를 벗하며 그윽한 향연 앞에서 부처님 상호를 뵙는 것이 목적일진대, 절 아래에선 세속의 본능들을 굽고 탐하는 난장판이니, 평범한 범생이 중생으로서 불계와 속계의 공존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동학사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는 동계사가 있고, 고려말 충신 포은 야은 목은을 추모하는 삼은각과 조선초 삼촌 수양에게 시해당한 단종임금과 그를 위해 목숨 바친 사육신 생육신 등 351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한데... 시류가 이럴진대 감히 오지랖 펼 처지..
불심처럼 그윽한 영평사 구절초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는 끝났지만 구절초들은 막바지인지도 모를 작은 꽃들을 올망졸망 피워내고 있었다. 절정기가 지난 탓 때문인지 영평사 뒷동산에는 이 빠진 듯 구절초들이 성근 곳도 많았지만, 익어가는 가을 속에 부처님의 불심처럼 곱게 피어나고 있었다. 구절초를 심어 꽃동산을 만든 이곳 스님들의 노력으로 영평사는 가을 구절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찰임에도 변화무쌍 변모하는 영평사에는 스님들의 혁신 정신이 그 동력의 원천이 되는 듯하다. 구절초 동산 외에도 추모공원을 만들고, 많은 장독들에 전통 장류들을 숙성시키는 등, 상업적으로도 재정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 순간 지나가는 과객으로서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절 주변의 조경만 보더라도 이곳 스님들의 노력은 기..
계룡산 신원사와 중악단 천도재 갑사에서 가까운 신원사를 찾았다. 신원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고 단아하며 깔끔한 절이다. 동학사와 갑사, 신원사가 계룡산의 대표적인 고찰인데 내 보기에는 그중 신원사가 제일 단아하며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절이다. 백제 말 의자왕 때 창건한 절로 역사가 깊다. 예전에 계룡산 골짜기에 우후죽순처럼 많았던 무속신당들을 철거하자 계룡산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 무속인들이 옮겨 간 곳이 신원사 주변이다.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과 가장 가깝기도 하거니와 산에서 뿜는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 신원사가 아닐까 나름 짐작해 본다. 계룡산 서남쪽에 자리한 신원사는 조선시대 중악단을 두고 산신께 제사 지냈다. 조선조 때 묘향산에 상악단을, 지리산에는 하악단을 세워 국가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
계룡갑사의 가을 기상하여 커튼을 제치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완연한 가을이다. 기온도 뚝 떨어져 아침 온도가 10도 안팎이다. 간단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계룡산이 가까워지면서 닭볏 같은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언제 보아도 참으로 신묘한 형상이다. 제법 눈에 익은 갑사 가는 길이었음에도 주차장 근처에서 내비게이션이 심술을 부렸다. 좁은 편도 일 차선에서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탓에 잘못 들어섰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 했다. 펜션들이 즐비한 마을의 좁은 길을 돌고 돌아 주차장에 들어섰다. 어젯밤까지 내린 보슬비 때문에 갑사로 가는 길 위에 젖은 낙엽들이 쌓여 있었다. 송풍기로 낙엽들을 날리는 굉음과 휘발유 타는 냄새가 요란했다. 시간을 두고 조금만 참으면 저절로 말라서 ..
여주 봉미산 신륵사와 강월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신륵사였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신륵사엔 주변부터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기 때문인지 식당을 찾아들었으나, 주인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로 요기하고 신륵사 경내로 들어갔다. 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는데,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매표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 신륵사에도 징수하던 관람료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신륵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고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들어가서 두 번 실망했다. 첫 번째는 가람막을 씌우고 범종각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신륵사 좌측면 바위 위 강월헌 정자 주변에 추락 위험이라 적은 현수막과 정자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어설프게 둘러친 금줄 때문이었..
백화산 반야사 월류정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반야사에 들렸다. 월류정 윗굽이에서 초강천과 석천이 만나는데, 반야사는 북쪽에서 흐르는 석천 상류 8km 정도 시냇가에 있었다. 월류정에서 둘레길을 따라 이곳까지 걸어서 오는 탐방객들도 더러 있는 듯,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곳 반야사 산비탈에 호랑이 형상 무늬가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반야사는 조용하고 아담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청정지역에 있는 예쁜 절이었다. 자동차로 일주문을 지나 반야사 경내에 주차할 수 있다. 백화산 반야사 일주문 반야사 종무소와 심검당, 오른편엔 중화당(종무소) 범종각과 요사채 뒤, 개울 건너 산골짜기 비탈에 자갈들이 만든 호랑이 형상. 대웅전과 극락전 대웅전 앞 백화산 능선 삼층석탑, 뒤에는 왼..
부여 만수산 무량사 꽃지에서 귀가하는 길에 보령시 뒷산맥을 돌아 부여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에 들렸다. 무량사는 남북국 시대 창건된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불태워 없앤 것을 임란 후 인조 때 터를 옮겨 중창했다고 한다. 특히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께서 돌아가신 곳으로 국내 유일하게 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재작년 겨울철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초가을 경관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량사 들어가는 일주문 무량사로 건너가는 극락교, 도로 왼편엔 매월당 부도가 있고, 오른쪽에 무량사가 있다. 무량사 초입 요사채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이층 전각의 극락전, 구부러진 소나무 덕에 극락전 전경이 막히지 않았다. 무심한 소나무에도 불심이 가득한 듯하다. 왼편의 향적당, 천막 아래 현수막에 매월당 초상이 붙어 있었다. ..
5월의 마곡사 몇 번을 다녀왔지만 마곡사는 정감이 가는 사찰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을미사변에 왕비인 민비가 일제에 시해되자, 분한 마음에 황해도에서 민간인으로 변장한 왜군을 죽임으로써 그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 죄로 인천 감옥에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이곳 마곡사에서 잠시 의탁한 적이 있다.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목록으로 등재하였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통도사(양산), 부석사(영주), 봉정사(안동),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 등 7개 사찰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7~9세기 창건 후 현재까지 지속성, 한국 불교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구절초는 시들었지만 ... ... 수년 전, 구절초가 아름답다는 영평사를 보러 가다가, 영평사 입구에서 차가 막혀 방문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 구절초는 시들었겠지만, 옛 생각에 영평사를 찾았다. 갑자기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 집 밖을 나서는 것이 선듯 내키지 않았지만, 집콕하는 코로나 시국에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영평사는 생각보다 작은 절이었다. 동향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 앞에 부여 정림사지 5층 탑을 본뜬 시멘트 탑이 있었다. 향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겠다는 염원을 시멘트 모조탑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영평사 뒷산이 이른바 장군산인데, 이 일대에 구철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말라 시들은 꽃대의 흔적만 볼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생명력을 보여주는 몇 송이 구절초들을 보는..
하동 삼신산 쌍계사 남해도에서 돌아올 때, 하동 섬진강변 길을 택했다. 섬진강 구비가 아름답고 벚나무숲 가로수가 예쁜 까닭이었다. 수년 전 구불구불한 길을 넓히고 곧게 펴서 도로가 강변을 따라 시원스레 펼쳐졌다. 좀 더 달릴 수 있을 터인데 속도가 50km-60km/h로 제한되다 보니, 운전하는 입장에선 짜증이 난다. 곳곳의 과속감시 카메라 때문에 속도를 올릴 수 없다. 그래도 은빛으로 빛나는 강줄기를 따라, 예전에 들렸던 악양면 들판의 부부송과 최참판댁을 추억하며,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를 돌아 쌍계사로 들어갔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길이 좁았다. 제한 속도는 40km/h. 안전을 위해서 그렇다니 할 수 없지만 전방에 차가 없으면 시원하게 주행하게 할 수는 없을까. 차밭이 많아 길..
남해 금산 보리암 보리암 아래 전망은 절경으로 꼽는 명승이라는데, 이전에 두 번을 방문했지만, 안개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관음포 충무공 유적을 참배한 후, 금산 보리암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맑은 탓에 안개보다 더위가 걱정이었다. 가파른 금산 산마루를 구불구불 힘들게 올라 주차장 매표소에 도착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공단에서 징수하는 주차료가 4000원으로 생각보다 과하단 느낌이었다. 주차장 매표소에서 한참을 올라가 보리암 입구 주차장에 주차한 후, 보리암 매표소에서 1인당 1000원씩 보리암 입장료를 내고 산길을 타박타박 30여분 걸어 올라갔다. 보리암 가까운 언덕 구비 전망대에서 드디어 탁 트여 막힌 곳 하나 없는 일망무제 남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여행의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사진..
부여 만수산 무량사 영겁보다 셀 수 없는 시간이 무량이라 들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 중생들에겐 상상조차 되지 않는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무량사란 이름을 가진 사찰들이 많다. 그동안 소문으로 들었던 부여 무량사를 찾아 나섰다. 부여에 있다 해서 가까운 거리로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먼 길이었다. 이정표를 보니 오히려 보령 대천 쪽에 더 가까운 모양새였다. 한동안 우중충하던 날씨도 화창했고 겨울답지 않게 포근해서 나들이하기에 좋았다. 무량사 넓은 주차장엔 이미 많은 차량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을까 염려했으나, 경내는 한적하고 고요했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2층 누각의 극락전은 고색창연하며 위풍당당했다. 만수산 자락 아래 높지 않은 담장을 두른 가람은 첫 방문임에도 친숙해 보였다. 생육신을 대표하는 매월당 김시습이 임종..
논산 불명산 쌍계사 길가 이정표만 보고 찾아 간, 쌍계사는 논산시 양촌면 절골 저수지 위 두 골짜기 계곡 사이에 있었다. 저수지 아랫마을 쌍계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올라 저수지 옆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쌍계사 앞에 또 주차장이 있었다. 대부분의 차들이 이곳에 주차되어 있어서, 아랫마을 주차장에 차를 놓고 먼 길을 걸어온 우리가 우스워졌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작업차들이 엉켜 있었다. 지금 불사를 진행하는 모양으로 곳곳에 건축 자재가 널려 있어서 어수선해 보였다. 넓은 마당 건너 우뚝 앉은 대웅전은 그 규모가 우람하고도 웅장했는데, 굵은 나무 기둥들이 자연목 형상 그대로였다. 쌍계사의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 초기에 창건했을 것으로 짐작하며, 고려시대 한 때, 500~600칸의..
반야산 관촉사 내게 관촉사는 비와 인연이 있나 보다. 맑은 하늘을 보며 출발했는데, 계룡산 고개 넘어갈 때 소나기를 만나기도 했고, 도착해선 가을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경내에 들어서서는 제법 가을비가 떨어져 내렸다. 예전에 들렸을 때도 여름 이슬비를 만났었다. 관촉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일주문을 돌아 들어갔다. 매표소 옆에도 간이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니 단풍잎들이 비를 맞으며 빨간 잎들을 불태우며 떨구고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관람객이 거의 없어 코로나 부담 없이 여유 있게 경내를 거닐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관촉사는 968년(광종 19) 혜명에 의해 창건될 때 조성된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 지안이 와 예배했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계룡산 신원사 계룡산은 본디 무속신앙이 발달한 곳이다. 박대통령 시절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며 산 속에 흩어져 있던 신당들을 없애고, 정비했는데, 지금 신원사 부근에 많은 신당들이 모여들었다. 신원사는 그 규모는 작지만, 조선말기 고종왕비 민비가 이곳의 산신당을 중수하여 몸소 머물며 기도했던 곳이다. 민왕후는 궁궐 안에도 신당을 짓고 무당을 불러 자신의 자손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굿판을 벌리는데 열중했다고 전한다. 국가의 번영보다는 자신을 위한 굿판의 보람도 없이 왜적들에게 시해되고 말았으니, 개인을 떠나 국가의 비극이었고 망국의 길로 치닫게 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상업적 목적으로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들어 그를 영웅으로 미화하여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마치 민족의 영웅처럼 대중들에게 인식되기도 했으나, ..
계룡산 갑사 그 동안 서너 번 들렸던 갑사. 절 중에 으뜸이라 '甲寺'라 한다고 하지만, 내 보기엔 으뜸이 될 만한 사찰은 아니다. 갑사보다 수려하고 고풍스런 가람들이 많은 터에, 으뜸이란 말은 과유불급이다. 때마침 일요일이라 코로나 사태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정리되지 않은 개천변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주차료는 3000 원을 받았는데, 여기 절들은 주차료가 일정치 않았다. 같은 공주 권역인 마곡사는 잘 정비된 주차장임에도 무료였고, 대전권역이지만 봉우리 하나 넘어 동학사는 4000원을 받으니, 중구난방이다. 계룡산이 국립공원이라 하나,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인데, 그를 핑게삼아 상술을 부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입구에 즐비한 식당가를 지나, 인적이 없는 옛길로 걸어 올라갔다. 호젓..
태화산 마곡사 벌써 기온이 뚝 떨어져 조석으로 쌀쌀했다. 대전에 며칠 머무르는 사이 짬을 내서 마곡사를 찾았다. 가을이 무르익는 마곡사 경내는 아침 시간이라서인지 탐방객이 없어 고즈넉했다. 상가들이 모여있는 주차장에서부터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일주문에 이르렀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탓인지 모든 게 평화롭고 여유 있어 보였다. 상가 앞 넓은 주차장은 충청도 인심을 반영하는 듯 무료로 운영하고 있었다. 동학사 주차장은 시간에 관계없이 4000원을 받았는데... 일주문을 지나니, 전에 보지 못했던 산속 숲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계곡길에서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자, 여기저기에 재래종 산 밤톨들이 흩어져 있었다. 동심에 빠져 밤톨들을 주으며 숲길로 마곡사로 갔다. 숲 사이로 절집들이 조금씩 비치기는 했으나 잡목이 무성한 탓으로 ..
계룡산 동학사 일 있어 대전에 내려갔던 길에 동학사를 찾았다. 70년대 후반 겨울에 갑사에서 산을 넘어 이곳을 지났던 적이 있었다. 가랑비를 맞으며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홀로 산을 넘을 때, 어찌나 외롭고 쓸쓸하던지 다시는 홀로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카메라를 친구 삼다 보니, 오히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의 진수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표현하려고 궁리하면서, 제법 자연의 풍광을 음미할 줄도 알게 되었다. 계룡산 남쪽 계곡을 따라 길게 가람을 배치한 동학사는 신라 때 창건된 절로 현재는 마곡사의 말사이다. 동학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충신들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때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
서산 내포 가야산 보원사지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이라 생각해서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마애삼존불상을 찾아갔다. 유감스럽게도 삼존불상으로 가는 다리 앞 나무 그늘 아래 노천 식당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왁자지껄 떠들며 식사를 하거나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저러고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일 듯 싶었다. 주차 후 계곡을 건너려 했더니, 아뿔사 다리 입구를 금줄로 칭칭 감아 출입을 막고 있었다. 이른바 삼존불상으로 오르는 계단 데크 공사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먼 거리를 달려온 입장에선 황당했다. 하릴없이 되돌아 나오려는데, 보원사지 철불상 현수막이 눈에 띄어 아쉬움을 달래고자 용현골짜기 위로 차를 몰아 나갔다. 용현 계곡에는 아직도 계곡 가장자리에 평상들을 깔아 놓고 장사..
보련산 보탑사 보탑사는 처음 들어보는 절이었지만, 법주사 팔상전이나 금산사처럼 목탑 구조 법당이라 불원천리 멀다 않고 찾아간 곳이었다. 절의 가람배치와 건물구조가 전통절집과 많이 달라 보였다. 건물들이 대부분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예쁜 꽃들을 심고 가꾸어 한껏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초파일을 맞아 주변 소나무 가지에 열매처럼 걸어 놓은 빨간 연등도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대부분 절들은 시중에서 대량 제작한 연등을 법당 앞에 줄을 띄우고 걸어 놓는데, 이곳에선 손수 만든 빨간 연꽃잎등을 나무에 달아서 내 보기에 훌륭했다. 비구니 스님들이 1992년 불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역사는 짧으나, 비구니 스님들의 섬섬옥수 정성들이 곳곳에 스며 있어서 낯선 구조이지만 나름 보기에 아름다웠다. ..
청명산 반야사 동네 뒷산 청명산 자락 아담한 반야사에도 연등이 걸렸다. 가족의 안녕을 빌고 돌아가신 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연등이 봄꽃처럼 피어서 부처님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다. 부처님 태어나신 초파일이 가까워지는데, 금년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다행이도 우리 나라에선 진정되고 있으나, 미국은 절정에 이르러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일본은 이제서야 시작이 되었다. 지구촌 시대에 모든 나라들이 더불어 교류하며 살아야 하는데, 나라마다 국경을 걸어 잠그고, 자국의 확산을 막으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좋은 계절에 태어나신 부처님. 부처님의 자비로라도 이 흉악한 바이러스 사태에서 벗어나기를... ...
양양 낙산사 소금강 계곡에서 나와 주문진 수산 시장으로 가서 생선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내륙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푸짐한 생선구이였다. 다음 날, 낙산사 가는 날은 바람이 거셌다. 미세 먼지가 많아 하늘이 맑지 않았고... 핸드폰에 강풍 주의보와 산불 경보가 수시로 날아왔다. 십 몇 년 전, 산불 때문에 홍련암 하나만 남기고 모두 타버린 낙산사였기에, 산불 주의보가 실감나게 느껴졌다. 봄철 동해안 산불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확산되기 때문에 무섭기 그지없다. 이제 낙산사엔 산불흔적은 없다. 경내를 거닐다 보니, 나무숲 아래 낙엽들을 모두 치워 산불에 대비하는 노력들이 곳곳에 보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낙산사 경내는 탐방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도처에서 묻어났다. 양양에 들릴 때면, 대부분 지나가듯 방문하는 낙산사라 ..
양양 휴휴암 주문진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가 얕은 언덕 너머, 바닷가에 있는 작은 암자 휴휴암을 찾았다. 몇년 사이 작은 변화들이 보였다. 휴휴암 들어가는 도로변에 주차장을 넓게 만들어 관람객들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타고 4-500m정도 되는 암자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행자들의 안전에도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 사이 암자 앞 바닷가 너럭바위 한가운데 용왕을 모시는 제단이 만들어졌고, 암자내 상업시설들이 좀더 들어서 있었다. 또, 너럭바위 주변에 방생용 치어들을 판매하는 수조와 먹이 판매소도 있었는데, 그 덕인지 너럭바위가엔 양어장처럼 커더란 물고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물고기 떼 가까이 오리들과 갈매기들이 함께 있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 오리들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지 않아 물고기..
용인 연화산 와우정사 와불(臥佛)은 석가님이 돌아가실 때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교에서 수도자가 수행하면서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여 죽음에 이를 때, 인간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되는데, 이를 '열반에 든다' 또는 '입적한다'고 말한다. 석가님은 인간으로서 최초로 도를 깨우쳐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이를 추앙하여 부처님으로 우러러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는 부처님이 수없이 많다. 크리스트교는 여호와 하느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지만, 불교에서는 어제의 불한당이 오늘 도를 깨우쳤다면 오늘의 부처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절에 가게 되면, "성불하십시요."라는 인사를 듣게 되는데, 이런 인사는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다. 성불은 아무 중생이나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읽었던 김성동의 "만다라"가 연상된..
칠현산 칠장사 경주 불국사보다도 더 오래전에 지었다는 칠장사였다. 칠장사는 칠현산을 배후로 두고 전개된 고찰이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칠현산은 고려 문종 시대 혜소국사가 이곳에 살며 도적질을 일삼던 일곱 도적을 개화시켜 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당시 혜소국사는 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으며, 칠장사 역시 당시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그 이전 신라 말에는 왕권 다툼에서 희생되어 쫓겨난 궁예의 어린 시절 피난처로, 궁예는 이곳에서 열 살까지 무예를 닦았다고 전한다. 이곳 죽산 지방은 미륵신앙이 크게 일어난 곳으로 궁예가 세력을 형성한 근거지여서 궁예와 관련한 유적과 이야기들이 많이 전한다. 또한, 예전 임꺽정 드라마를 sbs에서 방영할 때 그 무대로 나온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 갖바치 출신..
수도산 봉은사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 갔다가 여유가 있어서 봉은사에 들렸다. 모처럼 미세먼지에서 벗어난 듯, 날씨가 쾌청해서 하늘이 푸르렀다. 조석으로 쌀쌀한데 한낮엔 4월임에도 26도를 넘는 더위가 몰려왔다. 봄철 점퍼 차림으로 나갔는데, 더위를 주체 못 해 쩔쩔매었다. 행인들의 옷차림이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벌써 여름옷을 입었거나, 아직도 겨울 패딩조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차림새였는데, 봄옷을 입고 나간 나로서는 너무 더웠다. 봉은사는 벌써 초파일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봉은사 현판이 달린 큰 문을 지나자마자 법당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붉은 연등들이 가득 차있었다. 그 덕에 그늘져서 나 같은 방문자들은 제법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다. 예전 입구에서 봤던 보우대사 동상은 자취를 감추고, 내가 제..
해남 달마산 미황사 해남 땅끝마을에서 올라오며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미황사였다. 마치 금강산 능선 하나를 떼어놓은 듯이 북쪽 두륜산을 경유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지나가는 한반도 백두대간의 마지막 줄기 달마산 능선은 산수화를 그린 병풍만큼이나 아름답다. 그 아래 미황사는 동편에 석벽 병풍을 두르고 점잖게 서해를 굽어보고 앉아 있었다. 이곳에선 구태여 인위적인 멋을 부릴 필요가 없다. 빼어난 산수 한 자락에 자리 하나 빌려 여러 채의 절집들이 법당을 중심으로 정답게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을 뿐이다. 불교가 주를 이루는 대부분의 동남아 사찰들은 하늘을 찌를 듯 추녀를 치켜세우고, 화려하게 황금색으로 과장하여, 세속의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호사를 부린다. 얼마전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사원들은 멀리서 볼 땐 크고 아름다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