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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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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문학촌 기존의 경춘선 선로를 직선화한 춘천행 전철을 2010년 12월 개통 이후 처음 타 보았다. 옛 경춘선은 청량리역에서 춘천역까지 운행했으나, 현재 춘천행 전철은 일부 청량리역에서 출발하고 대부분은 상봉역과 춘천역을 오고간다. 경춘 전철 승차가 처음이어서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으로 환승하여 상봉역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전철을 탔다. 예전엔 가평을 지나면서 북한강변을 끼고 달리기 때문에 차창밖 경치가 수려했으나 직선화된 철로는 백양리에서 강변을 떠나 강이 보이지 않는 강촌역과 김유정역으로 연결하여 경치가 예전만 못하다. 북한강가에 있던 강촌역은 역사를 이전하여 아름다운 북한강 경치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예전의 강촌역은 레일바이크역으로 바꿔서 레저활동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유정 문학촌에 가기 위..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이제서야 2본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동시에 전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중앙박물관으로 갔다. 우리나라 불교예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두 사유상이기에 이 전시장은 의의가 큰 듯하다. 예전엔 격년제로 전시하는 등, 수시로 바꿔가면서 사유상 한 본만을 전시하곤 했는데, 21년 가을부터 전시실을 서편 2층으로 옮겨 두 본의 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태자시절의 모습을 구현한 것으로 소년의 모습이다. 석가모니께서 소년 시절 출가하기 전, 인생무상을 깨닫고 깊은 사유에 빠져 회의적이면서도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태자의 영화로운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사유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묘한 깨달음의 순간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전시장 이름도 '사..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사당 모처럼 마음먹고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에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대웅전을 해체하여 보수하는 중이었다. 청룡사 절집들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 기둥들을 세워 지었다. 구불어진 것은 굽은 대로, 배부른 것은 부른 대로 다듬어 세워서 자연 그대로의 멋을 지닌 곳이었다. 하릴없이 멋쩍게 청룡사에서 나와 인근 남사당 바우덕이 사당까지 걸어 올라갔다. 사당 바로 앞에 마을 다목적 회관이 가로막고 있어서 보기에 좋지 않았다. 사당 담장 안에 바우덕이 동상이 있었다. 바우덕이 용모가 평소 상상하던 모습과는 달리 현대 도시 여성의 얼굴이었다. 전통적 여인상과 달리 낯설어 보였지만, 없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사당문이 잠겨 있어서 영정은 보지 못하고 동상으로 대신했다. 앞으로 이 동상의 모습이 바우덕이 이미지로 떠오를..
예산군 추사고택 바야흐로 따스한 봄날씨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놀이 가기 좋은 날이었다. 애석한 것은 구름이 끼어 날씨가 화창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 수준이어서, 작심하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집 밖부터 차들이 밀리기 시작해서, 충청도 시골길까지 한적한 도로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말끔하게 정돈된 추사고택에 이르러, 추사 기념관부터 들려, 추사의 생애부터 학습했다. 조선말 유명 서예가로 알고 있던 추사 김정희, 기념관 안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그가 당대의 명문거족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예산땅에 자리 잡은 것도 영조시대 영의정이었던 김흥경(경주 김씨)의 아들 김한신을 영조대왕이 사위로 맞으면서 비롯되었다. 영조대왕이 애지중지하던 화순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이곳 예산 땅,..
아리랑 문학관 김제 벽골제 공원 맞은 편에 있는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 "아리랑"을 읽지 못해 논평할 처지는 아니나, "태백산맥"을 통해 익히 알려진 작가이기에 관심 있게 둘러 보았다. 김제평야를 배경으로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저항이 줄거리인 듯싶다. 80년대를 풍미했던 "태백산맥"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개인적 소견으로 조 작가를 그리 좋아하진 않으나,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부지런하고 진정성 있는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석정 문학관 부안에서 김제로 오는 국도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았다. 막힘없이 곧게 뻗은 도로에 아스팔트 포장까지... 게다가 아침에 차량통행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쾌속주행했다. 자동차도 시원스레 쭉쭉 앞으로 나아가 친구에게 "엄지 척" 차성능을 추켜세웠다. 연식이 좀 지나긴 했으나 액셀을 밟으면 밟은 만큼 반응이 빠르고 잘 나갔다. 격포에서 동쪽방향으로 달리는 경로여서 아침햇살에 눈부셨지만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몰려들어 제법 몽환적 분위기를 보였다. 황사도 아닌, 그 자잘한 미세먼지에 근심걱정을 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린 시절 코끝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겨울바람과 바람까지 보일 것 같이 청명하고 눈부시던 햇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뿌연 시야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불상이다. 석굴암의 크고 근엄한 불상보다 사람크기로 작고 아담하고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같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애 삼존불이다. 더욱이 서산 궁벽한 마을 냇가 낀 골짜기 한 귀퉁이에 누군가가 새겨놓은 삼존불이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서산 운산면은 구름 '雲' 뫼 '山'으로 그야말로 구름이 모여 있는 산골짜기 마을이다. 아직도 곳곳이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단지 이런 청정 지역 산능선에 거미줄처럼 고압선들이 얽혀 있는 것이 안쓰럽게 생각된다. 예전엔 시골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찾아갔는데 이제는 서산 IC에서 곧장 뻗은 길을 따라 운산면 소재지를 지나 10여분 달려가면 산 아래 저수지 옆, 작은 터널을 지나..
인제 박인환 문학관 돌아오는 길에 인제읍에 들러 박인환 문학관을 찾았다. 박인환 시인은 향토시인은 아니다. 강원도 인제에서 1926년 태어난 후, 곧 상경하여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8·15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한 때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했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하기도 했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윤동주 문학관 얼마 전 뉴스에서 윤동주 문학관 소식을 들었던 차에 지인과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경복궁 서쪽마을 효자동 통인시장 앞에서 내려 먼저 서촌일대를 돌아다녔다. 삼청동 일대 북촌마을이 유명 관광지가 되더니, 서촌지역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골목 안 도로가엔 옛날 구멍가게 정도였을 점포들이 모두 커피와 음료, 먹거리, 또는 액세서리들을 팔고 있었다. 난마처럼 얽힌 전선줄을 반공에 띄워 놓고 복작거리고 사는 모습들이 7-80년대를 떠오르게 했으나,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팔고 사는 물건들은 현대적인 것이어서 묘한 시차를 느끼기도 했었다. 복잡한 서촌을 뒤로하고 청운동 언덕에 오르니, 푸른 숲 위에 우뚝 선 남산의 서울타워가 보기에 좋았다. 언덕 아래 한옥으로 지은 청운 문학도서관을 지나, 서시정, 윤동주 시인의 ..
조선청화백자 조선청화(靑畵) - 푸른빛에 물들다. 국립중앙박물관 난생 처음 조선청화백자를 많이 보았다. 아마 평생 볼 것을 한꺼번에 다 봤는지도 모르겠다. 도자기의 미학에 대하여 아는 바 없는 문외한이지만, 미술에 조예 깊은 친구 손에 끌려 견학하면서 다양하고 풍성하게 차린 조선 청화백자의 성찬을 보았다. 왕실에 바쳤던 도자기부터 제사 그릇, 문구류, 술병, 관상용, 식기, 무덤 부장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기들을 보면서, 조선사람들의 애환을 느껴보는 것 같았다. 국보급에서 개인 소장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에 취하여 작품들을 하나하나 소화해낼 수 없었다. 동선을 따라가며 그저 느끼는대로 셧터를 눌렀다. 궁궐에서 사용하는 도자기의 파편들- 광주 분원리 도요지 도자기 제조의 본이 되었을 교본 구름 용무늬 도자기 ..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삼층 불교조각전시장 독립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는 꼭 이곳을 방문하여, 반가사유상의 오묘한 미소를 느껴보곤 한다. 이번 방문엔 화려한 관을 쓴 78호 사유상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삼산관을 머리에 인 83호 반가사유상이 있어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마침 박물관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듣게 되어 더더욱 좋았다. 이 반가사유상은 작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미국 유력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앉은 자세지만 정적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면서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모습"이라고 소개하는 등, 뉴욕타임스 등도 찬사를 이어갔다. 한 때, 문화재청은 문화재 훼손 우려를 이유로 '반가사유상 반출 불가' 입장을 표명했..
안동 이육사문학관 청량사에서 내려와 도산서원을 목적지로 안동으로 향했다. 역시 구불구불한 도로였는데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굽은 길을 돌아 돌아 나가는데, 문득 이육사문학관 안내판이 보였다. 그리고 보니 이육사의 고향이 바로 안동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시 청포도와 함께 떠올랐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대부분의 문인들이 간사한 한 치 혀로 ..
박수근 미술관 양구를 찾게 된 것은 순전히 박수근 미술관 때문이었다. 보통학교만 나와 독학으로 그림공부해서 화가로 입신한 그는 가히 하늘이 낸 화가라 싶다. 어려서부터 화가의 자질을 인정받은 탓에 화가로 대성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끝내 실현시킨 입지적 인물이 되었다. 간난과 질곡의 역사 속에서 고생을 겪지 않은 이 땅의 서민들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선생의 가난은 이 땅의 역사가 빚어낸 슬픔이었다. 어쩌면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취업했던 주한미군 초상화부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미군 초상화로 연명하던 그를 알아본 것은 미국인 밀러부인이었다. 이후 그녀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사주고 후원해 주는 훌륭한 스폰서가 되었다. 밀러부인은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박수근 화백의 그림들을 꾸준히 사주었고, 전시회도 열었는..
시(詩)와 철학(哲學) 해안분지에서 되돌아 나올 때는 무겁던 하늘에서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졌다. 양구에서 하룻밤을 묵으려는데, 숙소 찾기가 어려웠다. 양구 읍내로 나와 시장통 안으로 들어섰으나, 주차장 있는 모텔이 눈에 뜨지 않아 좁은 시내를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모처럼 들어갔던 곳은 방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이유인즉슨 양구에서 무슨 체육대회가 열린단다. 체육대회가 열리면 지역경제야 다소 활성화되겠지만 찾아드는 나그네들은 푸대접을 받게 되니 여행자 입장으론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이윽고 군청 부근 야산 아래에 있는 모텔에 숙소를 정했는데, 방이 여간 깔끔한 게 아니었다. 대부분 모텔들이 하룻밤 대충 재우고 돈이나 받는 현실임에 비해, 주인의 깔끔함이 드러나는 곳이어서 고마운 생각까지 들었다. 저녁 식사 후,..
2014 화랑미술제 어려서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었다. 만화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고, 좋아하는 만화 속 주인공들을 공책 갈피에 모사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래서인지 학교 미술 시간이 제일 즐거웠었다. 그래서 미술부에 들어가기를 원했는데, 안타깝게도 미술부는 돈이 많이 들었다. 그것이 내 발목을 잡아 그림의 꿈을 접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좋은 화구도 마련하고 캔버스에 이젤까지 갖추고 붓과 나이프를 사용하며 유화까지 시도했었는데, 생활이 바빠서인지 잠깐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간 어느 사이에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군 졸병시절에 산꼭대기 대공초소에 홀로 올라서 군인 수첩에 쓰지 말라는 일기를 쓰며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무료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
사진과 회화 사이 2014 화랑미술제 사진과 그림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그림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카메라보다 더 정교하게 자연을 그대로 모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의 모사는 기계의 힘을 빌리면 되니까, 화가들은 자연에서 보고 느낀 주관적 감정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화가들은 사진기보다 더 정교하게 자연을 모사하려고 애쓴다. 아름다운 자연을 모사하고 싶은 사람들은 기계인 사진기로 자연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 기계로 자연을 대하다 보니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자연을 바라보고 카메라에 감상을 실어 자연을 담아낸다. 자연은 자연이되 있는 그대로가 아닌 사진가의 주관에 의해 재해석된 자연이다.
유년의 꿈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덕에 COEX C홀 2014 화랑미술제에 다녀왔다. 그 중에 가슴 뭉클했던 그림 몇 점. 유년시절, 희미한 영상들을 재현한 그림들. 60년대, 양지바른 황토벽에 기대어 봄볕을 쬐던 생각이 난다. 또래 소녀들이 참으로 곱다. 그 때 우리 또래애들은 대부분 단발머리에 스웨터를 입었었는데 가난했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유년의 영상을 선명하게 일궈준 화가가 고맙다. 이혜민, 그는 남자다.
정지용 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벗은 안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
정호승 북콘서트 인근 도서관에서 개최한 정호승 북콘서트! 감각적 이미지로 공감을 자아내게 하던 시인이었기에 귀찮음을 떨어내고 다녀왔다. 옛날엔 문학의 밤이라고 해서 잔잔한 음악을 깔고 시낭송회를 하곤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북콘서트란다. 북콘서트란 말이 너무 생소해서 거북하기도 했지만 시인을 만나 그의 육성을 들어볼 기회가 많지않은 터이라 기쁘게 경청할 수 있었다. 정호승 시인의 인생이야기 뒤에는 서율이라는 혼성 밴드가 시인의 노래, 또는 시인의 산문과 관련된 내용을 가사로 만들어 노래로 들려 주었다. 시를 바탕으로한 노래 가사는 물론 좋았고, 맑은 여가수의 목소리는 더더욱 쓸쓸한 가을밤을 청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값싼 눈물과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대중가요에 찌들은 세상을 잠시나마 맑게 정화시켜주는 듯 했다. 게다가 왕년..
봉평 이효석 문학관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 평창의 산간마을 봉평을 메밀의 대명사로 만들어 버렸다. 예로부터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못해 논농사를 망쳤을 때, 대체식물로 심었던 것이 메밀이었는데, 산간마을 봉평은 일찍이 논농사가 어려워 메밀을 많이 심었었다. 대한민국에서 메밀의 산지가 어찌 봉평 뿐일까마는 이제 메밀은 봉평산이라야 가장 신뢰할 수 있게 되고 말았다. 춘천막국수가 유명한 것도 메밀이 춘천주변에 많이 생산되었던 작물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토속적이며 서정적인 단편소설 "메밀꽃..."은 일제강점기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이다. 가난하고 못생긴 장돌뱅이 허생원의 하룻밤 사랑이야기에 환상적인 메밀꽃 핀 밤풍경을 결합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동이라는 총각 장돌뱅이를 연계하여 부자의 연을 암시하고 있다. ..
원주 토지문화관 두루 아시다시피 박경리 선생은 경남 통영사람이다.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여고를 나온 선생은 그녀의 선배가 김동리의 부인이었던 연고로 김동리의 도움으로 1955년 현대문학 8월호에 단편소설 "계산"이 추천되어 문단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작품활동을 거쳐 19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토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았고, 26년 만인 1994년에 "토지"를 완성하여 전 16권으로 출판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한국문단의 거장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그녀가 살며 "토지'를 집필하던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우고 문인들의 집필활동을 지원하는 등, 문화활동을 하던 중 2008년 5월에 이곳에서 타계하였다. 통영시 산양면에 선생의 문학관과 유택이 있다. 그리고 "토지"의 의 ..
거제 청마 기념관 북상하는 길에 거제시 북서쪽에 있는 둔덕면 방하리 소재 청마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동안 청마 유치환은 통영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제도에서 이곳 산방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 기념관을 세우고, 태어난 곳에 초가집 생가를 복원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는 그의 묘가 있다. 청마 유치환은 옛적부터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단 줄을 안 그는./ "이란 그의 시 이 실려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게다. 통영에..
"레 미제라블"-바리케이드 너머엔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는 동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숨죽이며 울었다. 두 시간 40여분의 지루하다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났을 때, 객석을 박차고 일어나는 관객조차 없었다. 실패로 끝난 청년들의 혁명임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민들과 청년들이 바리케이드에 진을 치고 "바리케이드 너머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있다."며 합창하는 엔딩 장면에서 오늘의 현실이 떠올라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식상하리 만큼 숱하게 읽고 들었던 레미제라블의 줄거리임에도,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 장면도 놓치기 아쉬운 영화였다. 화면을 압도하는 죄수들의 노역장면을 시작으로, 도둑임에도 오히려 촛대까지 보태주신 신부님에 감화되어 장발장이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
운보의 집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한국화가 운보의 집을 찾았다. 눈 내린 야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 때문인지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날씨는 맑았으나, 여름 하늘처럼 두꺼운 구름들이 창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구름 때문에 들쭉날쭉하던 햇살도 차가운 바람에 따뜻한 기운도 잃었다. 몇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어서 운보의 집으로 가는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다만 눈이 내려 들과 산이 흰 세상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과 응달진 곳엔 빙판이어서 위태로웠다는 것이 다르긴 했다. 운보의 집에 도착하니, 입구에 매표소가 나타났다. 전에는 무료로 개장했었는데, 그 사이 세월이 바뀌어 유료화했나 보았다. 입장료는 4000원이어서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멀리서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찾아온 노고에 비하면... 매표소 ..
몸살 앓는 백제의 미소 - 서산 삼존 마애불 모처럼 큰맘 먹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돌아 마애삼존불을 찾았는데, 개울물 건너는 다리부터 공사판으로 어지러운 풍경이었다. 삼존불에 오르는 계단 옆으로 석재를 끌어올리는 레일이 설치되어 볼상사나웠다. 삼존불상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불이문도 엉망으로 해체되어 있고, 그 주변이 성의 없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보수를 하려고 이토록 자연스러운 주변 경관들을 파헤치는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천년 풍상을 견디고 오늘에 전하는 삼존불은 자연과 하나 된 아름다움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 수 있을까. 왜 이리 문화재를 못살게 들볶는지 모르겠다. 그전에는 삼존불 위에 비바람을 피하는 전각을 짓는다고 삼존불상 옆 암벽에 들보 구멍을 뚫었었는데, 전각을 철거한 지금 그 흉측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삼존불..
반가사유상 연화관을 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중앙박물관에 갔었다. 작년에 국보 제78호 반가 사유상을 봤기 때문에 1년마다 교체된다는 얘기를 듣고 박물관 3층 불교 조각실에 갔던 것이었는데, 작년 그대로였다. 다행인 것은 관람객들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오붓이 사유상의 주변을 돌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몇 컷 촬영하고 밖으로 나왔다. 작년 불교신문의 보도대로 1년마다 교체전시했으면 좋으련만... 현재, 반가사유상실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독특한 모양의 탑형 보관을 쓰고 있다. 이 관은 일월식 삼산관으로도 불리는데, 정식 명칭은 금동일월식 삼산관 반가사유상(金銅日月飾三山冠半跏思惟像)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던 시절에 인생의 무상함..
국립 중앙박물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1년마다 바꿔 전시된다던 3층 불교 조각상 전시실의 반가사유상은 작년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서 매우 섭섭했다. 입구부터 3층까지 한 바퀴 휘돌며 관심 있던 유물 몇 점들을 촬영하고 돌아왔다. 무료로 운영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유물전시도 뛰어났고 동선도 좋았다. 그 공간을 대충 한 바퀴 도는데도 다리가 저리도록 힘들었다. 체험학습 나온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박물관 전시실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데 제지하는 사람 하나 없어서 안타깝기도 했다. 안내하는 직원들에게서는 피로한 빛이 역력했고... 유물촬영을 위해 밝은 f 1.4 50mm로 촬영했다. 출입구 근처의 계단 구석기 시대의 석기들... 토기... 청동 조각에 새겨진 농..
신라 기마 인물형 토기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본 신라시대 기마 인물형 토기에 한참을 머물며,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취했었다. 많은 유물 중에서도 특히 마음이 끌렸다. 예전에도 이곳에 한참을 머물며 지니고 있던 카메라로 촬영했었는데, 그 시절 카메라 수준이 보잘것없어서 어둠 속에 전시된, 토기들의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없었다. 북방 스키타이 계통의 것이라 추정된다는데 신라시대의 복식과 말 장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말과 인물의 형식이 매우 유사한 두 점의 토기는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되었다. 말을 탄 인물이 넓은 밑받침에 서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속이 비어 있고, 컵 모양의 수구(受口)가 있는 동물형 토기이다. 말의 궁둥이 위에 안으로 구멍이 뚫린 수구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하게 솟은 장식이 붙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