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135)
슬로베니아 블레드 오스트리아와 접경지대인 줄리앙 알프스 밑, 프레드보르의 호텔 Alma에서 블레드까지는 30여분 거리였다. 블레드는 역시 줄리앙 알프스에서 흘러내린 석회수가 모여 호수를 이룬 곳으로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어린 시절, 이발소 그림에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하다. 이 호수는 고대 빙하 활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호수 가운데 나룻배를 타고 갈 수 있는 플레타나(pletana) 섬이 있다. 섬 안에는 성모승천 성당이 있고, 이 성당에서 종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블레드 호숫가 북쪽 벼랑 위에 블레트 성이 우뚝 솟아 그 경관이 아름답다. 1400년대 독일 황제 헨리크 2세가 주교인 알부인에게 이 지역의 땅을 선물하자, 알부인 주교가 호수 벼랑 위에 성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후 보수되고 개축되어 현재..
슬로베니아 줄리앙 알프스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홍역을 치르고 캄캄한 밤에 호텔로 돌아왔다. 어둡고 좁은 산골길이라서인지 버스 기사는 몇 번을 되돌려 길을 찾았다. 캄캄한 밤이라서 여장을 풀 새도 없이 잠 속에 빠져 들었다. 새벽에 깨어 뒤치다꺼리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창밖에 동이 트고 있었다. 창밖엔 높고 험한 알프스 산봉우리들 한 구석부터 햇살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먼지 하나 없는 청정한 대자연 속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 호텔은 호수 곁에 있었다. 밤중에 도착한 터라 주변 경관을 볼 수 없던 탓이었다. 아침 일찍 낚싯대를 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 그를 따라가다가,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길이 나지 않은 푸른 초원 위에 아침 이슬이 신발 위로 떨어져 흘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초원 끝, 숲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자다르에서 크로아티아 북서쪽, 슬로베니아 국경과 가까운 자그레브로 갈수록 목축지가 많아졌다. 대체로 이 나라는 석회암지대로 농사지을 땅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륙의 대부분은 돌산과 구릉지대여서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형성되어 있었고, 그나마 아드리아해에 접한 해안지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는 듯했다. 걷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시간이 더 많은 여행이어서 창가에 스치는 풍경들이 대체로 그랬다. 수도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에서 마지막 여행 일정이었다. 자그레브를 거쳐 슬로베니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일정을 서둘렀는데, 결국 국경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슬로베니아 입국 관리들은 버스 승객들을 별도로 심사했는데, 가뜩이나 국경을 통과하려는 차량들이 긴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그들은 ..
크로아티아 자다르 쉬베크에서 가까운 크르카 국립공원 앞 호텔 Vrata Krke에서 1박 했다. 불행히도 침실이 호텔 3층 정면으로 돌출된 낮은 지붕의 방이어서 천정이 낮고 무더웠다. 모기가 걱정돼서 문단속을 단단히 한 터라 몹시 무더웠으나 인내하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천정을 보니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벽에 붙은 전원을 켜니 시원하게 잘 돌아갔다. 다른 방은 에어컨이 없었지만, 다락방이라 설치했던 모양이었다. 억울해도 헛일이었다. 내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 호텔 창밖 국립공원의 풍경만 시원스러웠다. 북쪽의 자다르와 오클레시안 궁전이 있는 스플리트의 중간지점이 쉬베닉이었다. 자다르는 고대엔 로마, 중세에는 베니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 유적이 많은 바닷가 도시다. 베니스 지배 당시 쌓았다는 두터운..
크로아티아 쉬베닉 보스니아 메주고리예에서 국경을 넘어 다시 크로아티아 쉬베닉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여겼던 보스니아 인상이 구겨지는 일이 생겼다. 한적한 도로에서 교통경찰에게 단속된 것인데, 가이드에 의하면 교통경찰관이 차를 세우곤 까닭 없이 20 유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과거 90년대까지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그땐 교통경찰에게 단속되면 면허증 밑에 만 원짜리 한 장 접어 끼워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 시절 나도 무단 유턴하다 걸렸는데, 경찰관이 저녁도 못 먹었다며 투덜대었다. 어쩔 수 없이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주었더니 이러면 안 된다며 면허증 밑에 접은 지폐를 함께 줘야 보기도 좋다며 연습까지 시켰다. 어찌 보면 서로 윈윈이라 나쁠 것도 없겠지만, 피차 모두 분명한 범법 행위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엔 이..
보스니아 메주고리예 메주고리예 마을은 협곡 위 고원지대에 있었다.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대부분의 지형은 석회암지대로 구릉이나 협곡들이 많았다. 버스는 협곡 지대 마을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 고원지대로 올라갔다. 메주고리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1981년 마을 뒷산 중턱에서 여섯 명의 처녀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신 곳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다만 포르투갈의 파티마처럼 로마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곳은 아니다.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지는 돌길로 몹시 험했다. 그리 뾰족하고 날카로운 돌길은 아마 처음 본 듯하다. 그 돌길을 수많은 순례자들이 밟고 다녀 그 돌 끝이 닳아 반질반질했다. 작은 돌이나 맨 땅을 딛으려 애쓰며 언덕길을 올랐다. 놀랍게도 맨발로 그 험한 길을 오르내리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톨릭 기..
보스니아 모스타르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니크에서 다시 국경을 넘어 보스니아 모스타르로 향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모스타르 인근으로 접어들자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교회 첨탑보다 모스크 미나르가 더 많이 솟아 있었다. 그 만 회교도들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오스만 트루크 체제에 순응하기 위한 개종이 많았으리라고 전한다. 사람들이 크로아티아보다 유순하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Blagaj 호텔에 들었는데, 직원들이 친절했다. 손님들이 더울까 봐 객실에 에어컨까지 미리 켜 두는 배려도 있었다. 식사 시간에 젊은 직원이 다가와 호텔 5분 거리에 유명한 곳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말하는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듣는 우리가 긴장까지 했을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해서 뒤따라 나섰다가 앞서간 그룹을 따라가지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아침 보스니아 네움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 앞에서 승합버스로 갈아탔다. 두브로브니크 성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 오르는 길은 좁고 험해서 대형버스는 불가능했다. 승합차는 갈之자로 산등성이를 구불구불 휘돌아 돌아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까지 성으로부터 올라오는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었다. 케이블카가 더 빠르겠다는 말에 탑승객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지체되기 때문에 승합차가 편리하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과 도시의 새빨간 지붕들은 검푸른 바닷빛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지중해 연안 주택들의 지붕은 어딜 가나 빨간색이었지만... 내려갈 때도 역시 승합차를 타고 험한 길을 돌아서 갔는데, 대부분 일방통행로여서 놀랐다. 성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
보스니아 네움 스플리트 투어 후 드브로브니크로 가기 위해 보스니아 네움에서 숙박했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을 길게 차지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에 해안선이 끊겨 있었다.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의 결과 달마티아의 거의 전역이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었던 라구사 공화국(현재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이며 당시에는 도시 국가 상태였음)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네움은 양자 간의 완충 지대로서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이때 확정된 국경선이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복잡한 분쟁을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네움(보스니아어: Neum)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로 통하는 유일한 해안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폴리트비체로 몰려드는 인파를 뒤로 하고, 근처에서 송어 구이로 점심을 먹고,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지었다는 스플리트 궁전으로 이동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중부 달마시안의 항구 도시로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디오클레시안 궁전은 로마시대에 지은 궁전으로 현재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궁전의 남쪽 성벽은 본디 바다에 접해 있었으나 후대에 바다를 메꾸어 확장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그동안 로마 시대의 성벽 안에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건축물들은 지속적으로 개축되어왔다. 궁전 안 건물 아래층은 지금도 여러 가지 상업시설로 활용되어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성 안 통로들은 좁고 건물들은 오래되어 낡고 노후되..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드디어 기대했던 발칸 여행 하이라이트인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왔다. 그동안 사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며 현지 가이드를 따라 매표소를 통과하여 첫 전망대에 당도했는데, 아뿔싸, 건기라서 수량이 줄어들어, 텅 빈 주전자에서 짜내는 물처럼 폭포물이 졸졸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먼 길을 고생해서 예까지 왔는데, 실망한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폭포보다는 구경 나온 수많은 유람객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어쨌거나,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한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의 뒤를 따라 일행과 떨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폭포 아래까지 갔다. 물줄기가 가늘었지만 폭포는 폭포였다. 창덕궁 뒷뜰, 작은 바윗돌에서 실날같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어마어마한 폭포..
크로아티아 라스토게 로빈 관광 후, 자그레브를 조금 지나 카를로바츠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른 아침에 숙소를 떠났는데, 안개가 자욱했다. 이 지역은 신통하게도 날씨가 조석으로 선선했다. 열대야가 기승부리는 우리나라 폭염과 차이가 많았다. 한낮에 무더울 것으로 예상했음에도, 생각보다 그리 덥지 않았다. 9시에 개장한다는 인형 마을은 아직 열지 않았다. 입구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정각 9시 개장 후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 플리체비체의 축소판처럼 작고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예전에 작은 폭포에서 물을 끌어들여 물레방아를 만들고 방앗간에서 밀을 빻았었단다. 지금은 쓰지 않는 물레방아만 한 구석에 뎅그랗게 놓여 있고, 널찍한 잔디 마당 주변으로 작은 폭포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예전 TV 예능프로..
크로아티아 로빈 슬로베니아 피란에서 국경을 지나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크로아티아 해변 도시 로빈으로 내려왔다. 유럽에서 국경을 지나며 여권심사를 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국경 검문소를 수월하게 통과할 때도 있지만 운 나쁠 때면 별 이유도 없이 까탈을 부릴 때가 많다고 한다. 여행의 끝 무렵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들어오는 날 이 횡포 때문에 국경 검문소에서 두 시간 이상 지체했다. 우리 3 공화국과 유신 시절에 도로 길목마다 서슬 퍼렇던 검문소들이 생각났다. 도로 길목 검문소에서 군인들과 경찰들이 날카롭고 위압적인 시선으로 승객들을 쏘아보며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검색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검문에 걸리는 것은 휴가 나온 군인 쫄병들과 간 밤 꿈자리 사나웠던 소시민들이었다. 이 검문으로 간첩 잡았다는 말은 제대로 듣지..
슬로베니아 피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1991년 독립한 인구 200여만 명의 슬로베니아는 2017년 기준, 국민 소득 21,062달러로 독립한 유고연방 다른 국가보다 월등한 국민소득을 지닌 나라이다.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을 접하며 북서쪽에 이탈리아, 북쪽엔 오스트리아, 동북 녘에는 헝가리, 남쪽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마주 한다. 아드리아해에 40여 km의 짧은 해안을 가진 덕에 해양으로 통하는 숨통이 트여 있다.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슬로베니아 남서쪽 해안 마을 피란이 첫 번째 방문지였다. 우리나라 드라마 배경으로 나왔던 마을이라는데, 드라마에 관심 없는 탓에 버스가 태워다 주는 대로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간단한 투어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베니스 해안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항구 도시 피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안 마을이었..
슬로베니아 피란까지 여정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새벽에 기상해서 5시 25분 공항버스를 탔다. 7시에 인솔자를 만나 E창구 루푸트 한자 창구에서 발권했다. 인터넷 티켓팅 할 때, 좌석이 떨어져 걱정했으나 창구 직원이 19 JK로 창가 자리에 이어 붙여서 발권해줬다. 오전 10시 15분 인천을 떠나 뮌헨까지 10시간 20분 걸려 13시 35분경 도착한다. 시차는 7시간으로 우리 시간 오후 6시 35분이니까 낮에만 비행한다. 창가에 앉았는데 날개 중간 윗자리라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행 중에는 태양빛이 강해서 창문을 내내 닫고 있었기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볼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두 사람 앞을 빠져나가니까 몹시 불편했다. 장거리 여행시엔 복도 쪽이 편리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좁은 자리에서 마음대로 뒤척이지도..
수니온 곶 포세이돈 신전 그리스 여행 8일째, 투어 마지막 날이다. 우리나라는 며칠 째 미세먼지로 고통받고 있단다. 먼지 하나 없이 맑은 공기,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있는 그리스가 부러웠다. 가는 곳마다 신화가 숨 쉬고 있고 그 신화 속 인물들이 살아서 걸어 나올 것 같은 곳, 숱한 설화들이 역사로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 바로 그리스였다. 400여 년을 터어키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은 불굴의 나라가 그리스였다. 그리스 북쪽 테살로키니로부터 남쪽 모넴바시아까지 종주하고 아테네에서 투어를 마감하려니 아쉬운 마음도 컸다. 마지막 여정으로 아테네 남동쪽 50여키로미터에 있는 수니온 곶으로 갔다. 에게해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는 바다 길목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다했던 곳이..
서구문명 발상지 아테네 아테네는 천만 그리스 인구 중 절반인 오백만이 살고 있는 그리스 최대 도시답게 교통량이 많고 복잡했다. 인상적인 것은 노후 차량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자동차 생산 공장이 없는 탓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폐차 수준을 훨씬 지난 차량들이 건재하게 시내를 활주하고 있었다. 경차 아토즈, 비토스, 마티즈, 아반테 초기형 등 한국산 차량들도 많았다. 2000cc 이상 차량은 고급차로 세금이 높기 때문에 작은 차들을 선호해서 작은 차량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진 때문에 대도시임에도 고층빌딩이 없었다. 물론 우리처럼 고층 아파트도 없었고 3-4층 정도의 다가구 주택들과 개인 주택들이 대부분이어서 무엇보다도 시야가 편했다. 아테네 투어 핵심은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답게 곳곳에 유적들..
사도 바오로가 구원한 코린토스 코린토는 미케네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 헬레니즘 시대에 산업과 무역, 상업화된 오락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그 뒤 기원전 146년경 로마 장군 뭄미우스가 도시를 해체하였다. 그 후 100여 년 정도 방치되어 있다가 기원전 46 년 경에 줄리어스 시저가 재건하였고, 후에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로 발전하여 로마제국 지방 총독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코린토는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 사이에 있어서, 로마나 유럽과 아시아 간의 통로를 이루는 동서 해상로와 육상로의 관문으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그 까닭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여 제2의 '소돔과 고모라'로 불리며 방탕하고 부도덕한 도시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
기원전 1300년전 미케네 신화와 서사시 속에 등장하는 미케네 왕 아가멤논, 아가멤논이 통치했었다는 곳이 내가 미케네에 대하여 알고 있던 전부였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스, 헥토르, 헬렌, 페리스의 이 이야기는 브레드 피트가 '아킬레스'로 출연한 영화 '트로이'로 재연되었었다. 몇 년 전 터어키에 갔을 때, 볼 것 없다던 트로이에서 기원전 천년이 넘는 시대 영웅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감격했었다. 수많은 천재지변과 풍상으로 옛날 바다와 전장터도 볼 수 없었지만, 가슴속에 몰려드는 벅찬 감동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었다. 트로이를 망하게 한 것은 미케네 왕 아가넴논의 야심 때문이었다. 그는 동생의 복수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복심은 토로이 정복으로 챙길 경제적 이익이었다. 그 결과, 트로이는 멸망하고, 미케네는 승리했지만, 아..
섬안의 요새 모넴바시아 스파르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여유 있게 모넴바시아로 향했다. 비취처럼 푸르고 맑은 바다를 가진 그리스 남부 해안은 보이는 풍경마다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항(漁港)과 어선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도로 깎인 상처투성이 우리나라 어선들과 비린내로 가득 찬 우리나라 어항과 달리 그리스에는 항구마다 가득히 정박해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요트들이었다. 섬이 많은 바다를 가진 이들은 아마도 어업보다는 레저활동으로 올리는 수입이 더 실속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처절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아서인지도...... 그리스 지방도로는 시원하게 뚫린 우리나라와 달리 좁고 구불구불했다. 노련한 운전기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시골길을 달렸..
300 결사대의 스파르타 미스트라 투어 후, 호텔에 여장을 풀고 스파르타 유적 탐사에 나섰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가 북쪽 끝 지점 축구장 앞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청동상으로 재현되어 두 눈을 부릅뜨고 칼과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영화 '300'에서 보던 근육질 단단한 사나이 모습으로 고대 스파르타 군대의 용맹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BC 480년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에 맞서 친위병 300명과 함께 남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300 결사대에서 비롯되었다. 이 동상 앞에 서서 청동상을 바라보자니, 영화 '300'에서 재연되었던 영웅들의 장엄하고도 처절했던 전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
비잔틴 최후의 도시 미스트라 올림푸스를 떠나 스파르타가 가까워질 무렵 차창밖으로 범상치 않은 산맥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파르타 서쪽 산맥으로 티아게토스 산맥이었는데, 정수리가 하얀 눈으로 덮여 스파르타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진이 심한 그리스엔 높은 빌딩이 없다. 고대 그리스 최강의 군사도시였던 현대 스파르타는 자그마한 소도시였다. 작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오밀조밀 모여있던 스파르타시 북쪽 끝무렵에서 그리스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벽난로엔 장작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함에도 종업원은 반팔 티 차림이었다. 식사 후, 잠깐 나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식당 북쪽 가파른 산 위에 작은 성채가 보였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보며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성채가..
올림픽의 성지 올림피아 델피의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자 햇살이 쨍하게 내비쳤다. 버스는 이오니아 해 코린토스만의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바다와 올리브 밭, 그 사이 시이에 빨간 지중해식 주택들이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풍경들이었다. 그리스는 우리나라보다 국토는 넓지만 인구는 1000만여 명이란다. 그중 절반은 아테네에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이외 지역은 밀도가 현저하게 낮아 한가하다고 한다. 지방도로나 고속도로에도 차량통행이 복잡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앞차를 무리하게 추월하려 하지 않았다. 화물트럭이 앞길에서 답답하게 서행을 해도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여유 있게 뒤따라 갔다. 아마도 그리스식 생활습관인지도 모르겠다. 가이드에 의하면 수년 전 그리스 경제위기는..
세상의 중심 신탁의 성지 델피 칼라바카에서 그리스 첫밤을 보낸 후 08시 30분에 숙소를 떠났다. 구름이 조금 보이긴 했으나 아침햇살은 좋았다. 신탁의 성지인 델피는 남서쪽 방향이었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갈수록 먹구름이 늘어나며 햇살이 변덕스러웠다. 차창 커텐으로 햇볕을 가려가며,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 보았다.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는 태어난 아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핏덩어리인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지만, 하인은 간난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남몰래 코린토스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장성한 오이디푸스는 여행 중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졌다. 동서고금을 통해 하늘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
칼라바카 공중 수도원 메테오라 어린 시절 봤던 영화 중 벼랑 위 요새에, 행글라이더를 타고 은밀하게 침투해서 공격하던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그곳이 칼라바카 메테오라가 아닌가 싶다. 테살로니키에서 간단하게 투어를 마치곤 이내 공중 수도원으로 유명한 메테오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식 점심을 먹었다. 식사 전에 먹는 둥근 빵은 터어키와 같았고, 샐러드, 돼지고기 완자와 감자가 나왔는데, 입맛에 맞아 한 접시를 모두 비웠다. 이스탄불에서 테살로니키로 오는 도중 간단한 기내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탓에, 휴게소 식당에서 그리스식 점심을 배불리 먹어 포만감이 몰려왔다. 오랜 비행과 달라진 시차, 포만감으로 온몸이 노곤하여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으나, 차창밖 이국의 색다른 풍경을 보는 재미에 차마 눈을 감고 잘 수 없었..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그동안, 얼마나 그리스 여행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사에 예약을 했다가 번번이 취소되곤 했다. 여행사에 개인적으로 당부도 해보았지만, 내가 대단한 손님도 아닐진대 기억했다가 성의껏 안내해줄 여행사들도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지로 산토리니가 성황 중이라지만, 애당초 그곳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크레타섬이라면 모를까 배를 타고 편도 8시간을 소비하며 그저 이색적인 풍광을 본다는 것은 지루하고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신화 속의 나라였던 만큼, 그리스가 유럽 여행의 시작이 되어야 했었을 것을, 유럽 내 이 나라 저 나라들을 다니며, 숱한 가톨릭 성당들에서 세월의 흔적과 그 규모에 감탄했었다. 신화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올림픽 때마다 옛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
비엔티엔-2 비엔티안에는 라오스의 수도답게 차량들이 많았다. 라오스 여행 마지막 날 비엔티엔에서 큰 사찰만 두 곳을 돌아 보았다. 가이드의 전언에 의하면 라오스는 외적의 침략과 약탈 때문에 변변한 문화재가 없다고 한다. 크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원들도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라 시멘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근접해서 보면 어딘지 조금은 엉성해 보였다. 왕복 10시간이나 소요되는 고통스런 비행 속에 라오스 투어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없다. 유럽인들이 꿈꾸는 여행자의 천국이라는데 내 보기에는 이제 잠에서 막 깨어난 신생개발국가일 뿐이었다. 문화유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수려한 자연경관이 많은 곳도 아니어서 여행사마다 놀이 중심의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했는가 싶다. 그런데, 레포츠는 우리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놀이 ..
방비앵의 소소한 풍경들 3박 5일의 여정이라지만 저녁에 떠나고 새벽에 돌아오니 실제 여행은 3일이었다. 게다가 비엔티안에서 방비엥까지 이동시간이 3-4시간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3일 동안 라오스 여행은 비상식적이었다. 여객기 안, 좁은 좌석에서 끔찍스런 고역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여행 스케줄이었다. 볼거리가 적은 라오스는, 주변 강대국들에 휘둘려 주권 없이 살았던 때가 많고, 산악지대가 많아 경제환경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공산주의 독재체제여서 아쉬운 것들이 많아 보였다. 수도임에도 문화유적들이 변변치 않은 듯했고, 우리가 방문했던 방비앵도 수려한 자연 외엔 볼거리가 적어, 물놀이나 짚라인 같은 레저활동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오죽하면 라오스 3일 여행 동안 밤마다 마사지를 연속해서 세 번이나 받으라고 했을까. 마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