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에서 나와 소수서원을 목적지로 내려가는데, 도로가에 영주 선비문화수련원이란 입간판이 보였다. 도로 좌측으로 고풍스러운 기와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보기 드문 풍경이라 차를 돌려 주차장에 진입했는데, 때마침 수련원에서 반남박씨종친회를 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이곳에 선비촌과 소수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이 함께 모여 있어 동시에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조선 최초 사액서원이라는 소수서원에 들렸다. 주세붕이 세운 서원으로 영남의 선비들이 학문하던 곳이라 그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서원 내부는 수리공사중이었다. 여러 가지 보수용 구조물들과 접근할 수 없도록 세워놓은 펜스들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넓지 않은 서원 안을 둘러보고는 되돌아 나와 연결된 선비촌으로 가서 옛날 양반들의 가옥들을 관람했다. 그중에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쓰인다는 인동장씨 종택이 인상 깊었다.
내가 조선시대 살았더라면 어떤 신분으로 살았을까.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무릎 위에 나를 앉히시곤 우리 집안의 유래와 긍지감에 대해 조곤조곤 가르치시곤 했는데, 장성한 뒤로는 우리 가문의 내력을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해방후 삼팔이북에서 월남해서 남한의 이곳저곳에서 뿌리 없이 살아온 내력으로 보아서는 그 어마어마했다는 가문의 내력을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유학을 은근히 뻐기면서도 책임감 없이 방탕했던 부친 탓으로 가난 속에 세끼밥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소년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가문의 올곧다는 선비정신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생애 몇 번 만났던 큰할아버지 장손자 형님은 술로 한평생을 살다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맨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취중에 항상 옛 조상들의 행적을 자랑하며 광산김씨 문원공 후손이라는 긍지감을 잃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은 0.0001%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허풍만 떨다가 처자식들에게 가난만 물려주고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전 인구의 15%를 넘지 않았고, 조선 전기 성종때의 기준으로 인구의 10%가 넘는 35만 명이 공노비였었고, 양반들의 사노비까지 합하면 적게는 인구의 삼분의 일이, 많게는 전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단다. 조선 중기 유학의 융성으로 비로소 성씨가 자리 잡게 되었음에도, 갑오경장 이전까지 성을 가진 사람들은 전인구의 30%에 불과했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 족보 내지는 가승이 없는 집안이 어디 있으랴만, 명문대가라고 뻐기는 집안도 면밀하게 그 내력을 추적해 보면 대부분이 돌쇠나 떡쇠의 후손일 것이었다.
반상이 없어지고 모두가 평등한 민주사회가 도래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새삼스럽게 반상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나, 뻐기듯이 자랑하는 명문대가의 후손이라는 것은 그리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것인데, 영남지방에 내려와서는 아무개씨 종택이란 고풍스러운 집들을 상당히도 많게 만날 수 있었다. 양반의 기품으로 선비답게 살았다면 36년 일제강점기 때 퍽이나 탄압을 받았겠고, 친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종가들도 온전히 보존되기 어려웠을 터이라 따지고 보면 양반의 핏줄을 자랑할 것은 한 푼의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지사들의 가문은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거나, 고국을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방랑하며 가난한 동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솔직히 떵떵거리며 행세하는 집안치고 일제에 충성했던 관리의 후손이거나 친일하며 부를 쌓지 않은 후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들이 쌓아온 부가 누적되고 상속되면서 사회지도층이나 경제적 자산가로 군림하는 현실은 우리나라 도덕성과 가치관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걸 보고 자라는 자손들은 무엇을 교훈으로 여기며 올바른 가치관이나 역사관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연좌제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갖고 체면치레라도 해야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그러다 보니, 일신만의 영달을 위해 아첨과 모략,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등, 정의롭지 못한 출세주의가 팽배하여 참으로 후안무치하고 염치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뼈대 좋은 명문대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가문의 자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희망을 잃지 않고, 허울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진정한 선비정신을 지니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할 수 있는 명문대가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서원을 탐방하고 선비촌을 거닐며 쓸데없는 궁상만이 가득한데, 함께 갔던 아들녀석이 우리 가문의 내력을 물어오기에 아는 대로 대충 이야기는 해주었지만 그리 떳떳하고 자신감이 있지는 않았다. 선비촌 구경 후, 입구에 주막처럼 차려놓은 식당에 들어가 베트남 출신일 법한 다문화 아낙이 차려주는 정갈한 묵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주막을 나서니 이미 주위엔 어둠이 내려앉아 사방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원등을 켜고 허우적허우적 숙소를 찾으며 달려 풍기까지 내려갔다. 시골 자동차들은 어찌 그리 어둠 속을 잘 달리는지 깜깜한 편도 1차선인 시골길에서 무섭게들 추월해 나갔다.
영주 선비촌 입구의 장승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 정문
서원 앞의 정자
문성공 안향의 사당
직방제와 영정각, 직방제는 글을 가르치는 스승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한다.
선비촌 입구의 초가들
인동장씨 종택
또다른 양반집
이웃한 선비촌 수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