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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사계 김장생 선생 묘역과 사당

  논산은 광산 김씨들의 집성촌이 많은 곳이다.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조상들은 대대로 연산에 연고를 두었다. 그런 까닭에 연산에 사계 묘역과 사당이 있다. 모처럼 명문가인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를 찾아 연산을 찾았다. 처음엔 종갓집을 들렸는데, 특이하게도 안채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영업시간 이전이라 인기척이 없어 대충 안을 살펴보곤 종갓집 뒤에 있는 묘역을 찾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계선생의 묘는 묘역 맨 위에 있었다. 사계 선생 묘 아래 양천 허씨 묘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사계 선생의 묘보다 크고 웅장해서 놀랐다. 알고 보니 양천 허씨는 사계의 7대 조모로 17세에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이 요절하자 친정 집안에서 개가를 서둘렀다. 딸은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개성에서 시댁인 이곳 연산까지 유복자 김철산을 등에 업고 걸어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 김철산이 이곳 연산을 바탕으로 김 씨 일가 자손들의 중흥을 이루었다. 이에 양천 허씨는 조선조 세조 때 정려문을 하사 받고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어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인근에 양천 허씨를 추모하는 영모재가 있다.

 

  광산 김씨는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 광산 부원군 김흥광이 시조이다. 조선 초기, 김장생의 7대조 김문(金問)은 과거에 급제했지만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고려말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인 부인 양천 허씨는 일찍 결혼했으나 1393년(이조 태조 2년) 17세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에 허응 내외가 어려서 남편을 잃은 딸을 재혼시키려 했다. 딸 허씨는 개가를 거부하고 시댁이 있는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까지 유복자인 어린 아들을 업고 내려왔다. 이때 호랑이가 허씨 부인을 연산까지 수행했다 한다. 아들 김철산(金鐵山)은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김정광(金廷光), 김경광(金景光) 등을 둔다. 김장생의 5대조 김국광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올랐고 승지, 병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개가하지 않고 유복자를 낳아 자손들을 입신양명시킨 양천 허씨는 뒷날 정경부인을 추증받았다.

  사계 선생 고조부 김극뉴(金克忸)는 사헌부 대사헌, 증조부 김종윤(金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 할아버지 김호(金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역임했고 아버지 황강(黃岡) 김계휘와 삼촌 김은휘는 학행과 덕망으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아들은 김집(金集)과 김반으로, 김집은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고, 김반은 김익겸을, 김익겸은 김만기, 김만중을 낳았다. 사계의 증손자 김만기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아버지로 풍정 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김만기의 동생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었으며,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첨삭>

 

 

 

양천 허씨 사실기

 

사계 선생의 7대 조모 증 정경부인 양천 허씨 묘

 

7대 조모 양천허씨 묘 바로 위에 있는 사계 선생의 묘

 

사계 선생 묘비

 

사계선생 묘 아래 전경,  바로 아래 7대 조모 양천 허씨 묘가 있다.

 

양천 허씨 묘 옆에서 바라본 사계 선생의 묘

 

사계 선생 동생인 金善生의 묘

 

양천 허씨의 유복자이자 사계 선생의 6대조 김철산의 묘

 

사계 선생 삼촌인 김공휘의 묘

 

묘역 아래 있는 사계 선생 종갓집 

 

솟을대문 앞에 세운 1864(고종1년)년에 김재경에게 내렸다는 홍살문 형태의 효자 정려

 

정문 왼쪽의 건물

 

정문과  마주하는 사계 선생의 재실 염수재

 

염수재 오른 편 뒤에 사당이 있고, 왼 편 뒤로는 과수원이 있었다. (화면으로 보는 방향) 

 

염수재 오른쪽 뒤, 사당

 

사당

 

사당 안 사계 선생과 부인 창녕 조씨 위패함

 

종갓집 측면 출입문. 사계 종가 안채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계 종가 측문과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