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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금관가야의 발상지 김해

 십여 년 전 겨울에 김수로왕릉에 들렸었다. 그땐 김해김씨 시조로서 수로왕릉이 보고싶어서였는데, 가야역사나 문화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구지봉이나 수로왕비 허왕후 능이 이웃에 있다는 것도 몰라서 달랑 왕릉만 보고선 자리를 떴었다, 그 후, 수로왕릉에서 구지봉과 허왕후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내 무지를 몹시 탓했다. 

 벌써 이곳엔 이팝꽃과 아카시아꽃이 만발했다. 송화가루도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차창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햇살이 퍼지면서 한여름 더위가 찾아들었다. 위성지도에서 탐색한대로 허왕후능, 구지봉 공원, 김해가야박물관, 대성동 고분군, 김수로왕릉을 차례대로 찾았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월요일이었다. 김해박물관과 대성동 고분 박물관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왜 월요일엔 박물관이 쉬어야 하는지 안타까웠다. 직원들을 교대로 근무 배치해서 먼 곳의 외래 방문객들에게 사시사철 개방할 수는 없을까. 모처럼 김해까지 고생해서 내려온 수고가 헛일이 되어 아쉬움이 컸다. 아마도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오라는 뜻은 아닐런지 스스로 위로하며 개방된 곳을 찾아 가야문화들을 피부로 느끼며 타박타박 걸었다.       


  구지봉 푯말, 허왕후 능에서 구지봉에 오르는 동산 길목에 생뚱맞게 서있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어서 먹으리." 가락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구지가', 혹은 '영신군가'이다. 가야의 아홉족장들이 이 구지봉 정상에서 땅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황금빛 관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 황금알 여섯개가 있었다. 그 알에서 여섯 동자가 깨어났는데, 그 중 하나가 김수로왕이었다는 것이다. 


구지봉 정상의 돌바위.  구지봉은 허왕후릉의 서편에 있는 구릉처럼 얕으막한 동산 위였다. 정상 위에는 둥근 원형 마당에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남근석 하나가 뎅그라니 서 있었다. 마침 소풍나온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먼지를 폴싹이며 구지봉석 주변에서 얼음땡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신화 속에 나오는 구지봉치곤 내 상상과 괴리가 컸다.  그나마 구지봉 주변의 고인돌 하나가 내 허전함을 조금 메꾸어 주었다. 구지봉을 넘어 서쪽에 김해 박물관이 있었는데 월요일이라 휴관... 아쉽게도 그 아래녘 대성동 고분군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인돌과 구지봉석


  수로왕비 허왕후 능, 본디 구지봉에 연결된 산자락인데 자동찻길이 둘 사이를 갈라 놓았다. 일제의 소행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강점기 35년 동안 한반도에 분탕질을 해가며 못된 짓은 다했으니까 욕먹어도 싸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라 새겼다.


  허왕후는 김해허씨 시조.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였단다. 공주가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  이른바 파도를 진정시킨다는 돌로써 국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인도의 돌이라고 한다.


  대성동 고분 주변의 가야군 기마군조형물. 용맹스러운 기상이 돋보였다.


 노천 고분관, 역시 문이 잠겨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대성동 고분들이 있는 언덕


  언덕 아래 고분박물관


김수로왕릉 정문인 숭화문


  가락루


  납릉정문과 수로왕릉, 납릉이 수로왕릉


  왕릉 옆의 추모 공간, 왼쪽이 숭선전, 우측이 숭안전


  숭선전과 숭안전


  숭선전, 수로왕과 수로왕비 위패를 모신 전각,


  숭안전, 금관가야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전각.


  수로왕릉 연못가, 가락국 건국신화 속의 여섯 알의 돌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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