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93) 썸네일형 리스트형 동구릉의 깊은 가을 흐린 듯하더니 햇살이 퍼지자 청명한 가을 하늘이 펼쳐졌다. 금년 8월 10일 동구릉역이 개통되었단 소식에 8호선 전철을 이용하여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터라 바삐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간 동구릉은 3-4차례 방문한 터라 그 풍경들이 눈에 선했지만, 아홉 능이나 있다 보니, 헷갈려 모두 기억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조선 태조의 건원릉과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영조의 원릉 정도였다. 지도 검색 결과 동구릉역에서 동구릉까지는 800여m로 걸어서 10여분 정도 거리였다. 3번 출구로 나와 직선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자동차 통행량이 대단히 많았다. 동구릉 안에 들어서자 시내에서 볼 수 없는 가을빛이 수려했다. 파문지듯 떨어져 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숲길을 걸으며 복잡한 세속의 시간들을 잊을 수 있었다. .. 11월에도 푸른 수원 향교 은행나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팔달산 남쪽 자락 아래 자리한 수원 향교에 갔다. 가로수 은행나무들은 이미 노랗게 물들어 낙엽 지고 있었으나, 수원 향교의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아직도 푸르렀다. 향교마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다. 공자께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연유로 향교에서는 은행나무를 상징적으로 심어 이를 행단이라 한다.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학은 조선 시대 국시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공자를 모시는 향교가 설립되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공산화 이후 본토에서 공맹사상이 완전 사라졌음에도 아직 공맹을 숭상하며 가르치는 우리나라 유림들의 정성은 대단하다. 유학 탓에 조선이 망했다지만, 동양사상의 중심인 유학의 인의예지 사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철학이 되어 우리 문화의 뿌리가.. 서인들의 성전 논산 돈암서원 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것은 조선왕조의 통치철학이었던 만큼 그 영향은 컸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유학은 탁상공론으로 평가절하되곤 하지만, 당대에는 목숨을 걸고 논쟁하던 사상이었다. 인조반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서인의 학문적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앙되는 김장생 선생의 평가는 논외로 하고 싶다. 서인세력들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임에도 명분 없는 쿠데타를 일으켜 실리 없는 외교로 어려웠던 백성들을 참혹한 정묘 병자호란에 빠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 세력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돈암서원은 그야말로 서인들의 거룩한 성전같은 곳이어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대전 논산간 국도변에 있는 탓에 지나는 길에 자주 들려 보지만, 서.. 망국의 설움이 서린 부여 정림사지 정림사지 역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 박물관은 정림사 건축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이 가득했었다. 이번 방문한 정림사 박물관은 부여박물관처럼 멀티미디어화 되어 아름다운 영상미로 방문객들을 황홀경에 빠트렸다. 정림사 오 층 석탑 모형 유리벽에 비추는 아름다운 영상들과 복도의 벽과 바닥까지 삼면을 비추는 영롱한 영상들은 별다른 세상에 온 듯 감동을 주었다. 게다가 박물관 내부에 만든 작은 돔 영화관은 10여 개가 넘는 액정 영상기로 관객석을 제외한 돔 내부 전체의 둥근 벽과 천장 바닥, 관객석 뒷면까지 영상을 비추어 마치 관객들이 영상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비록 15분짜리 애니메이션이긴 했지만 처음 보는 시설에 영상미가 뛰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넓은 주차장과 영상미가.. 국립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은 이전에 여러 번 방문해서 한동안 가지 않았었다. 그간의 변화가 궁금해서 오랜만에 들렸는데, 변화한 모습이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디지털 영상매체와 결합된 유물 전시가 그야말로 상전벽해 격으로 아름다웠다. 시각적 이해도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형 로비를 둘러싼 전시실 동선도 깔끔하고, 쉼터도 많아서 남녀노소 관람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전시 공간뿐만 아니라 전시기술이 놀라울 정도여서 백제의 슬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물관람에 감격할 정도였다. 주차장도 여유 있었고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경치도 아름다웠다. 또 정림사지가 근처에 있어서 연계하여 관람하기에 좋았다. 부여국립박물관 박물관 내부 원형 로비, 중앙엔 백제 시대 석조 대형 스크린을 보며 참선 따라 할 수 있는 공간 유물 전시관.. 부여 서동공원 궁남지 연밭으로 유명한 부여 궁남지.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지만 연밭마다 연잎이 싱그럽다. 7월 6일부터 이곳에서 연꽃축제를 한다고 벌써부터 준비에 바쁘다. 백제의 마직 수도였던 부여. 유감스럽게 패전국가인 탓에 유물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백제 무왕이 땅을 파 호수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궁남지는 이름 그대로 궁궐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궁남지를 둘러싸고 왕이 되기 전, 마를 파는 총각으로 변장한 서동과 궁궐에서 쫓겨난 선화공주의 연애담이 낭만적인 전설로 이곳에 전해져,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정자를 만들었다. 정자 이름은 '포룡정' 용을 안은 정자란 뜻이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옛이야기를 생각하며 연못 주변을 산책 삼아 한 바퀴 돌았다. 다행히 날씨가 흐려 햇볕은 그리 따갑지 않았다. 궁.. 공자의 후손이 일으킨 오산 궐리사 지난 겨울에 들렸던 오산 궐리사를 녹음기에 재방문했다. 궐리사는 논산시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제 2대 궐리사 중 하나로서 1792년 정조(16)에 창건되어 사액 되었으며 대성 공자를 봉안하고 있다. 오산 궐리사는 상시 개방을 하여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살아있는 교육현장이 되고 있으나, 논산 노성면에 있는 궐리사는 사유재산이라며 상시개방을 하지 않고 지역 행사 때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드는 폐쇄된 공간이다. 이곳은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중종때 도승지, 경기 황해감사, 대사헌 등 역임)선생이 낙향하여 서재를 짓고 서재 아래 은행나무를 심은 후 북을 걸고 두드려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며,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선생 별세후 자연 폐허가 되고 은행나무 역시 말라 주었다. 200여 년이.. 오월의 경복궁 오랜만에 광화문에 나갔다가 경복궁에 들렀다.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내국인들보다 더 많은 듯했다. 체험학습 나온 학생들도 많았고... 광화문에서 일직선으로 흥례문을 통과해서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 - 경회루 - 향원정 - 건청궁으로 돌아 나왔다. 오월의 신록과 따사로운 햇살이 걷기 좋은 날씨였다. 이따금 찾아보는 경복궁이지만 오월의 햇살 아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무하나 없는 자금성의 광대함은 없으나, 대륙의 삭막함 대신 아기자기한 숲과 단정하고 우아한 우리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껴본 하루였다. 초파일 행사 준비에 바쁜 광화문 광장 자리를 옮긴 해태와 복원한 월대 우연히 보게 된 월대 위 수문장 교대식(오후 1시) 흥례문 근정문으로 건너는 영제교와 다리를 지키는 석물 ..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으로 1634년 (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 들과 유림들이 창건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2019년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본디 현위치에 가까운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돈암서원 입구의 표지석 홍살문 산앙루 정면 -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유식을 위한 누각이다. 산앙루 후면 산앙루 이층 .. 화성 융건릉과 정조 효공원 요사이 며칠 동안 그야말로 북풍한설이 극성이다. 어렸을 때 주기적으로 순환되던 삼한사온이 생각난다. 추운 날이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양지녘 벽에 붙어 햇빛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 시절 손등은 왜 그리 거미줄처럼 갈라지도 터졌는지. 손 튼 데는 안티푸리민이 특효였지만, 그것도 귀해서 터진 틈으로 피딱지가 엉겨 붙어도 참으며 하릴없이 한 겨울을 넘겼다. 삼한사온이 없어진 지 오래된 오늘, 차가운 북풍이 얼굴에 부딪치니 새봄의 훈풍이 더욱 그립다. 날씨가 추운 탓에 하늘이 푸르렀다. 푸른 하늘 덕에 햇볕이 좋아 모처럼 바깥나들이로 오랜만에 융건릉을 찾았다. 몇 년 사이 주변 풍경이 많이 변했다. 용주사와 왕릉 사이에 있던 푸른 초원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흉하게 함석 울타리를 두르더니, 그 울타리가 없어지고..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지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거리에 왕궁리 유적지. 이곳도 예전에 가보긴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흘렀으니, 달라졌겠다. 역시 왕궁리 유적지 박물관이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었던 건물이 새로운 모습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전시되었던 유물들이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본 박물관 안 설비들은 멀티미디어화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것이 백제 수도가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익산 천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터라 박물관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 보았다. 직원분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왕궁리 백제 왕궁은 일종의 행궁이나 별궁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궁궐의 징표로 출토된 와당의 파편에 새겨진 글자가 '수부(首府)'.. 익산국립박물관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이동하여 주차장에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입구를 찾느라 한참이나 헤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이가 알려준 곳에 입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예전의 박물관에 갔지만, 그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인터넷 예약 후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옥상에 잔디를 덮은 기다란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이 새로 마련한 익산국립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안내도라도 세웠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박물관에서 기획전시관과 익산 미륵사지와 쌍릉 등에서 발굴된 익산 유적 전시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전시관은 훌륭했으나, 조도가 너무 낮아 글씨 읽기가 어려웠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은 내 불찰이기도 하.. 서동요 주인공으로 믿고 싶은 익산 쌍릉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하늘이 맑아 밖에 나왔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늘진 곳엔 잔설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아 익산 쌍릉으로 향했다. 예전에 두어 번 갔었으나, 그 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변화된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서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설화 속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흰 눈이 덮인 능을 바라보며 잠시 전설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내 멋대로 상상에 빠져 보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혈기왕성한 백제 청년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대전 국립 현충원 오랜만에 들린 대전 현충원, 지난해보다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산책 삼아 눈에 익은 현충원 길을 걸었다. 간간히 묘지석 앞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쓸쓸한 겨울 날씨를 대변하고 있었다. 현충탑에 참배한 후, 말도 많고 탓도 많은 독립 유공자 묘역으로 가서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아 묵념으로 고인께 감사함을 올렸다. 그동안 적적했을 장군의 묘 주변에 독립 유공자분들이 빈자리를 메꿔 주셨다. 자신의 삶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치신 분, 그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감사드렸다. 해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암울한 시절인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이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갔던 것이 스탈린의 정책 때문에 머나먼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 부여 왕릉원과 나성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승격되었나 싶다. 웅진 백제 시대 공산성 밖 송산리에 왕릉을 두었듯, 사비성 동쪽 3km 지점에 방어선인 나성(羅城)을 쌓고 성밖에 왕릉을 모셨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었는데, 이곳 능산리에선 왕릉의 주인이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곳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할 뿐이다. 부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전엔 능산리 고분들과 논 아래 습지에 갈꽃들만 무성했었는데, 그 사이 나성과 능산리 사지(寺址)가 발굴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재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긴 했다. 넓게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주차장.. 여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세종대왕 英陵에서 옆 숲길을 따라 효종대왕의 寧陵으로 걸어갔다. 이른바 왕의 숲길이었다. 700여 m 거리의 숲길은 우람한 적송들이 우거진 가운데, 인적조차 없어 고요하고 정감이 있어 운치가 있었다. 효종은 인조 4년(1626), 8살에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에 조선이 항복한 탓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었다. 인조 23년(1645) 5월, 귀국한 후, 1개월 만에 형인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고, 4년 후 인조 27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면서,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17대 왕으로 즉위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을 주창하며,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졌으나, 39세로 재위 10년 만에 아깝..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릉 모처럼 전철을 타고 영릉에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도착지에서 다음 장소로 이어지는 교통 연결이 원활하지 못했다. 여주 세종대왕릉역까지는 전철로 수월하게 갔지만, 전철역에서 영릉까지 이어지는 시내버스 배차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명색이 세종대왕릉역이건만 세종대왕릉까지 이어지는 버스를 40분 이상 기다려야하는 현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공교롭게 간격이 뜸한 시간에 도착한 탓에 역사 주변에서 40여분을 기다렸다. 차라리 걸어가는 것이 나을 성싶어 안내소에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신통한 정보는 없었다. 전철역에서 허무하게 40여분을 기다려 5km 정도 거리에 있는 영릉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영릉에 도착하자 수년 전 공사 때문에 영릉 주차장에서 되돌아갔던 생각이 .. 경복궁과 중국산 대여 한복의 한계 가을날답지 않게 연일 비가 내리더니 모처럼 비가 그쳤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챙겨 경복궁에 들렀다. 월대 공사로 광화문 출입이 막혀있어서 경복궁 서편 고궁박물관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평일임에도 관람객들이 붐볐다.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대부분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 찍기에 분주했다. 한복도 한류 탓인가 보다. 궁궐 안이 한복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났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나, 변형된 여성 한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치마폭을 넓히고 통치마 안에 둥근 테를 넣어 부풀린 것은 우리 고유의 한복 치마가 아니다. 한복치마는 통치마가 아니라 평면으로 된 차마를 허리에 감아 입는 것이다. 대여 한복의 대부분은 통치마로 보인다. 한복 치마에 서양식 맵시를 부.. 공주 무령왕릉 수년만에 무령왕릉을 방문했다. 그때보다 모형관의 모습이 달라졌다. 하기야 그대로 두고 방치한다면 발전도 없겠지만... 그런데, 딱히 특별한 무엇이 없는 듯하다. 유일하게 무덤 속 인물의 정체가 밝혀진 왕릉임에도 전시물이나 무령왕의 업적들이 심금을 울릴 만큼 마음속에 와닿지 않았다. 유네스코 지정 유적지구라고 요란스런 입간판 표지만 있을 뿐 유적다운 유적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백제 수도 60여 년 동안 도읍지였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나마 망국의 수도였기에 그 옛날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지정 역사지구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무엇이 있어야 할 텐데 허전한 것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무령왕릉 모형관을 나와서 .. 강경 미내다리 처음으로 가본 강경읍이었다. 예전엔 서해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들어와 젓갈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강경읍을 다니다 보니 곳곳에 젓갈 상점과 음식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강경읍에서 처음 찾은 곳이 미내다리였는데, 내비에 나오지 않아 근처를 목적지로 정하고 갔다. 근처에서 휴대폰 맵을 통해 찾아갈 수 있었다. 자동차용 내비보다 휴대폰 맵이 훨씬 정교했다. 미내다리로 가는 길은 하천 위 뚝방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교행이 어려웠다. 중간중간에 교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긴 했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300년이 지난 오늘의 미내다리는 제방을 쌓아올린 넓은 미내천 가장자리에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천의 물길도 그동안 크게 변한 탓으로 옛날엔 이 미내천도 작은 개울.. 태종 이방원과 순조의 헌인릉 어제까지 황사에 가려 뿌옇고 서늘하던 날씨가 하룻만에 맑은 하늘을 보였다. 푸른 하늘에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으나, 갑자기 기온이 치솟아 여름 날씨를 방불케 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걸었지만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봄 꽃가루들이 눈송이처럼 날려서 알러지 때문에 마스크도 벗지 못하는 어려운 외출이었다. 헌인릉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린 조선조 3대 임금 태종과 조선 23대 순종 임금의 묘이다. 애석하게 헌인릉 주변엔 정보기관이 있어서 평일임에도 헌인릉 방문과 상관없는 차량들이 주차장에 가득 차있었다. 입구인 인릉을 거쳐 헌릉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는데, 인릉은 아래에서 바라볼 때 경사가 심해서 봉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헌인릉 아래엔 비닐하우스 화훼단지들이 많아 왕릉과 조화롭지 않았다. 인릉은..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이러다간 봄 없이 곧 여름철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따금 가보는 곳이긴 하지만, 한동안 코로나 여파로 유엔초전기념관이 폐쇄되었었다. 봄나들이 겸 전시물들을 보기 위해 초전기념관에 들렸다. 죽미령은 한국전쟁 당시 기습남침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당시 참전한 미군 스미스 대대는 사전지식도 없이 7월 1일 주둔한 일본에서 황급히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 7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참호를 파고 아침 8시부터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부대와 보병 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적을 모르고 자신만만했던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보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전투로 북한군의 전력을 재평가하고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 오산 궐리사 오산 궐리사는 공자의 64 세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지도하던 곳이다. 공서린은 조선 중종 때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정조대왕은 이곳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궐리사'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조선으로 이주한 공자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태어난 공자의 고향 지명을 그대로 내린 것이다. 궐리사는 고종 8년(1871) 흥선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고종 31년(1894)에 다시 제단을 마련하여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다가 고종 37년(1900) 건물을 짓고 성적도를 모셨다. 성적도는 공자(孔子, BC 551~479)의 행적을 여러 장면으로 도해한 그림으로, 공자성적도 또는 공부자 성적도라고도 불린다. 104폭의 그림으로 구성.. 지금 종묘 정전은 보수중 오랜만에 종묘에 들렸다. 토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은 단체로만 입장이 가능해서, 한참을 기다려 지정된 시간에 입장했다. 문화 해설사 설명을 들으며, 해설사 뒤를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들처럼 따라다녔다. 애석하게도 정전은 가림막을 쓰고 보수 중이었다. 개인활동이 제한되니까 돌아보는 장소도 한정적이어서, 대략 50분 정도를 대충 둘러보고 나온 셈이었다. 종묘는 조선조 역대 왕과 왕후, 그리고 나중에 추존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1395) 9월에 완공하여,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 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 독립문과 서재필 1897년 중국사신들을 영접하던 모화관 앞 정문인 영은문을 헐고 대한제국이 중국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 자주국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운 문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동안 사용했던 중국 연호를 버리고 자체 연호 광무(光武)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본디 자리에서 이곳으로 70m 정도 이전하였다. 독립문 앞에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은 영은문(迎恩門) 기둥을 받쳤던 주초석이다. 영은문은 조선 초 태종 7년(1407)에 모화루(慕華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져 490여 년 동안 조선의 사대주의를 상징하였다. 영은문 주초석과 독립문, 독립문 외벽의 녹물과 오염된 부분을 깨끗이 닦아내면 보기에 좋을 것 같다.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서.. 논산 개태사와 천호산 유감스럽게도 논산지방은 대부분 그 유적지가 명확하게 밝혀진 곳이 많지 않은 듯하다. 막연하게 전설로 구전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런데, 황산벌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최후의 결전지만이 아니었다. 남북국 시대 말기 후고구려군과 후백제군의 마지막 패권도 역시 황산벌에서 결정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와 싸우던 후백제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일리천(현재 구미시) 전투에서 패하여 이곳 황산벌로 도주하였으나, 추격하는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싸울 의지를 잃고 후백제 왕 신검이 이곳 천호산 아래 주둔한 고려군 진영에서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에 왕건은 항복받은 자리에 통일을 기념하여 거국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고, 누르메 황산이란 산이름을 天護山(하늘이 보호하는 산)으로 고쳐 불렀다.. 공주 우금티 동학 혁명군 전적지 우금티 전적지 두 번째 방문이다.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이 맑아서 걷기에 좋았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알림터 위 안내문부터 읽으며 우금티로 향했다. 계단 위 고갯마루 옆에 있는 위령탑은 옮겨 새로 건립해야 한다. 이 고개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진 곳을 왜 고개 넘어 동학군이 넘으려던 우금티 안 쪽 관군과 일본군이 주둔하던 우금티 안쪽 공주 쪽에 세웠는지 이해되지 않고, 동학을 빌미로 권력에 아부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추구하던 부나비 같은 인물들이 동학혁명군의 원령들을 위로한다며 위령비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 고개를 넘어 충청감영을 접수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동학군은 고개 너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되고 말았다. 1894년 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간의 전투는 신식 화기로 무장한.. 공주 고마나루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며칠 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누구는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더 춥단다.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마나루터를 가보기로 했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데, 고마나루 관광지 주차장으로 안내를 했다. 주차장 가운데 세운 웅장한 웅비의 탑을 보고 주변을 돌아봤으나, 어린이 워터파크 시설뿐이었다. 주변에 공주 한옥 마을과 박물관이 있고... 하는 수 없이 지도 검색을 했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800m 정도에 곰사당이 있었다. 도로를 건너 잡풀이 우거지고 인적도 없는 숲 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숲길 흔적을 찾아 앞으로 나갔다. 드디어 숲길을 찾았다, 핸드폰을 보며 곰사당으로 걸었다. 소나무가 가득한 숲길 주변에 곰 조각들이 보였다. ..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