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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익산국립박물관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이동하여 주차장에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입구를 찾느라 한참이나 헤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이가 알려준 곳에 입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예전의 박물관에 갔지만, 그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인터넷 예약 후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옥상에 잔디를 덮은 기다란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이 새로 마련한 익산국립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안내도라도 세웠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박물관에서 기획전시관과 익산 미륵사지와 쌍릉 등에서 발굴된 익산 유적 전시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전시관은 훌륭했으나, 조도가 너무 낮아 글씨 읽기가 어려웠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은 내 불찰이기도 하지만, 조명이 너무 흐려 사진촬영도 불편했는데, 아마도 영상물 상영을 전제로 박물관을 꾸몄기 때문이 아닌가 나름 생각해 보았다.  

 

  박물관 구조나 전시물들이 멀티미디어 시대에 맞게 구성되어 관람하기 좋았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도 보기에 아름다웠다. 시멘트로 대충 보수했던 과거 일제의 잔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 여행 중에 수천 또는 수백 년 전 석재 유물이나 건축들을 보고 감탄했었는데, 비록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탑이라 할지라도 나름 뿌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겨울이 아닌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면 두 탑의 모습이 배산인 미륵산과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 같다. 

 

 

주차장에서 보는 박물관

 

박물관 입구 - 눈이 내려 미끄러질까봐서인지 곳곳에 금줄을 쳐놓았다. 처음엔 전체를 막아 놓은 것으로 착각했었다. 자세히 보니 한 곳만 틔여져 있었는데, 그곳이 입구였다. 눈을 치우면 될  일일텐데, 금줄들로 해결하고 있었다. 

 

박물관 로비, 가로로 기다란 화면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아름다웠다. (석탑의 뒷방향에서 보는 이미지, 오른쪽이 복원된 서탑. 서탑은 뒤에서 봐야 탑의 추녀를 볼 수 있다.)

 

기획전시관, 군산군도의 유물전, "바다 위의 성 군산군도" 

 

토기와 마제석기

 

토기와 뼈로 만든 도구들

 

청동기 유물

 

토기제품

 

바다에서 건져낸 청자기류

 

해저 난파선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영상을 배경으로 건저 낸 청자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중앙 로비

 

익산 미륵사 재현 모형, 석탑 사이에 거대한 목탑이 있고 그 뒤에 금당(법당)이 있는 구조이다.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보강되어 전해지던 서탑, 2001년 해체하여 2018년 돌탑으로 복원했다.

 

왕궁리 궁궐터 석탑과 발굴 유물

 

익산 쌍릉 출토 유물

 

쌍릉 대왕릉 내부 석실과 목관 모형

 

대왕릉에서 발굴된 목관, 일본산 적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쌍릉 출토 유물

 

과거 박물관, 현재는 어린이 박물관

 

미륵사지 안내문

 

미륵사지 석탑

 

왼쪽이 복원된 석탑

 

현대에 만든 동탑, 뒷산이 미륵산이다, 산 위에는 미륵산성이 있다.

 

동탑과 서탑 사이 금당(법당)터에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복원된 서탑, 동편 후측면엔 석탑의 추녀가 남아 있어서 온전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서편 후측면의 모습

 

서쪽 앞측면에서 보는 복원된 서탑의 서남쪽 모습, 기단 위의 추녀 두 개를 제외하곤 모두 망실되었다.

 

남동쪽 방향에서 보는 미륵산과 복원한 서탑

 

국립익산박물관 - <나무위키> 사진

 

  미륵사와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는 639년(백제 무왕 40년) 창건했다고 전한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동양 최대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했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소실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조 17세기경에 폐사(廢寺)된 뒤 서탑(西塔) 및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일부 석물만 남았고,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品’ 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하였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가 동탑지(東塔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에 정부에서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사업(中西部古都文化圈開發事業)의 하나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와 아울러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 자 모양의 가람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하였다.

  한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2001년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보구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한 석탑을 일반에 공개하였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1월 14일,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달라 논란이 되고 있으나, 요즘 견해로는 무왕 40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미루어 사택적택의 딸은 선화공주 뒤를 이은 무왕의 또다른 왕비로 추정하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을 더하자면, 무왕의 맏아들인 의자왕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지만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왕후가 새 왕비가 되면서 적국 신라의 피를 이어받은 의자왕의 입지가 좁아졌겠다. 때문에 40세가 되어서야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실 내에서 자신을 신라의 후손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타개하기 위해 본인의 사촌이 다스리는 신라를 맹공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익산 미륵사지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국립 박물관이다.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익산, 군산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며, 주로 백제 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1995년 1월 전라북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개소하여 전라북도 공립박물관이었다가, 2020년 1월 10일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새롭게 증축 개관하였다. <다음백과, 나무위키>에서 발췌 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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