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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부여 왕릉원과 나성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승격되었나 싶다. 웅진 백제 시대 공산성 밖 송산리에 왕릉을 두었듯, 사비성 동쪽 3km 지점에 방어선인 나성(羅城)을 쌓고 성밖에 왕릉을 모셨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었는데, 이곳 능산리에선 왕릉의 주인이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곳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할 뿐이다. 부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전엔 능산리 고분들과 논 아래 습지에 갈꽃들만 무성했었는데, 그 사이 나성과 능산리 사지(寺址)가 발굴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재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긴 했다.

  넓게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주차장 위에 있는 숭목전부터 들려 왕릉원과 능산리 사지(寺址), 나성(羅城)을 한 바퀴 돌면서 둘러보았다. 쌀쌀한 바람에 무심한 낙엽들이 나뒹구는 늦가을 풍경에 신라 고분들보다 작은 부여 왕릉원 무덤군들이 상대적으로 쓸쓸해 보였다. 

* 나성(羅城) :성의 바깥에 겹으로 쌓은 성

 

왕릉원 입구 표지석

 

숭목전, 최근(2019년)에 준공된 백제 왕들에 제례를 올리는 공간이다. 몇 채의 민가 앞에 덩그러니 세워진 모습이 왠지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왕릉원 출입문 안에 있는 안내문

 

왕릉원 가는 길 위에 새겨진 사비 백제 시대가  538년부터 660년임을 알리고 있었다.

 

고분군, 왼쪽엔 발굴작업이 한창이었다.

 

고분 유적 발굴 현장

 

왕릉원 서쪽에 모신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간 지 4개월 만에 병사하여 장안 밖 북망산에 묻혔다. 2000년 북망산에 가서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흙을 가져다 가묘를 만들었다. 

 

부여융은 당에 끌려간 후 662년 수군을 이끌고, 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망국의 백제땅으로 돌아왔다. 백제 저항군을 진압한 후, 당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유역을 지배하려 하였으나, 그는 신라군이 무서워 당나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부여융은 당나라의 장수이자 웅진도독을 역임하며 최고위 귀족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한편 부여융의 자손들은 웅진도독부를 대조영이 멸망시켰고 당나라는 이 도독부를 부활시킨 바 없기에, 명목상의 백제왕 작위만 어쩌다 받은 듯하다. 최근 밝혀진 부여융의 손녀 부여태비의 생애를 통해 부여융의 자손들이 당나라에서 누린 권세와 영예를 엿볼 수 있다. <위키 백과>에서 발췌

 

고분 벽화 모형

 

능산리 사지와 나성

 

능산리 사지. 1993년 12월 왕릉원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나성과 고분군 사이 이곳 논바닥에서 금동향로를 발굴하였다. 신라군이 진격해오자 급히 묻었던 금동 향로는 1300여 년이 지나 세상에 나타나 이제는 백제의 상징이 되었다.

 

금동 향로 발굴 현장의 당시 모형

 

발굴 당시 사진

 

나성 아래에서 바라본 능산리사지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복원한 능산리 능사 

 

부여 나성, 나성은 수도 사비성을 보호하기 위해 부여 3km 동쪽에 쌓은 외곽성으로 둘레 8km에 이른다.  

 

왕릉원 아트 뮤지엄, 고분처럼 꾸민 봉분 안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왕릉원 안내 시설

 

360도 원형 화면에 관련 이미지 영상들을 비추고 있었다.

 

출구로 돌아나가며 바라본 왕릉원,  깊어가는 가을에 감나무 한그루가 빨간 감들을 가지에 매달고 쓸쓸히 고분군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