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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백제 군사박물관 탑정호 출렁다리의 아쉬움에 저수지 인근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진입로 벚나무 가로수에 벚꽃이 만발하여 꽃잎이 눈처럼 날려 장관이었다. 박물관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어서 박물관 내부와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하는 용맹한 계백장군 동상을 세운 산등성에 올랐다. 코로나가 한창이었을 때, 박물관 내부를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내부 전시물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전시물이 빈약해져, 과연 백제 군사박물관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공을 들여 알찬 전시물을 갖추는 것이 급한 일이겠다. 백제군사박물관 외부 1층에 있는 백제군의 기병과 보병의 무장 2층의 전시물, 의자왕과 계백장군 등 백제 장군들. 백제장군들과 신라 김유신(좌로부터 3번째), 화랑 관창(좌로부터 4번째 키 작은 소년), ..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 지자체마다 출렁다리 설치가 유행이더니, 그간 시간이 흐르자 그 유행도 한물갔나 보다. 모처럼 찾아간 출렁다리에 인적이 뜸하다. 지난번 방문 때는 코로나가 극성이었음에도 출렁다리 통행료를 3000원씩 징수했었는데, 그 통행료가 없어져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국내 최장이라는 이 출렁다리를 위해 엄청난 건설비가 투입되었을 텐데, 그 비용을 어디서 회수할는지 걱정스럽다. 주변에 관광 인프라가 잘 조성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을 위해 보다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 건축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높은 산 계곡을 잇는 출렁다리는 산행을 돕는 편의 시설이지만, 고인 물 위 저수지의 출렁다리는 실용성이 없어 보인다. 휑하게 출렁다리를 건너갔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볼거리가..
계룡산 신원사 벚꽃 벌써 벚꽃이 지기 시작한다. 아쉬움에 모처럼 화창한 날씨를 핑계 삼아 벚꽃구경에 나섰다. 계룡산 신원사 벚꽃 사진이 기억에 남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신원사로 갔다. 신원사 대웅전 마당 앞에 있는 벚꽃이 탐스럽긴 했지만 고목인데다 마당 가득 연등이 달리고 천막까지 쳐있어서 기대만큼 화려하진 않았다. 경내를 한 바퀴 산책 삼아 거닐며 오전 한 때를 보냈다. 중악단 산신각
벚꽃의 계절 한낮의 기온이 20도를 웃돌았다. 매화꽃 옆에 있는 벚나무 꽃망울이 드디어 터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꺼내 들고 봄꽃맞이 산책을 나갔다. 팝콘처럼 터졌던 목련은 시들어 축 늘어져 버렸다. 개나리꽃이 만발한 산책로를 걸으며 바라보는 산등성이에 산벚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활짝 핀 벚꽃에 감개무량해졌다. 매화와 살구꽃 벚꽃은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서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벚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로소 매화와 구별이 되었다. 매화는 꽃수술이 많으나, 벚꽃은 그 수술이 매화보다 얌전하고 단정하다. 바야흐로 이제부터 며칠은 벚꽃의 계절이다. 금년엔 흐드러진 벚꽃구경을 어디로 가야 할까. 잔뜩 궁리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봄꽃 순례 어제 오후 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맑은 날씨에 봄볕이 따습다. 오후 한때 기온이 무려 20도로 치솟았다. 오후 햇살이 좋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아파트 뜰앞 살구나무 꽃이 만발하여 눈이 부셨다. 집에 되돌아와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시 나가 동네 주변을 거닐며 봄꽃 순례길에 나섰다. 살구꽃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그제까지 보이지 않던 제비꽃이 양지바른 언덕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집 뒤 공원의 산수유꽃과 홍매화는 절정기를 맞아 건드리면 원색물이 물감처럼 주루루 흘러내릴 것만 같다. 명자나무는 아직 망울진 모습으로 때를 기다리는 중이고, 양지쪽 목련은 팝콘처럼 터지며 피고 있었다. 길가 개나리는 이제 작은 꽃잎들을 피어내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 등산길엔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 봄빛을 알렸다. ..
산수유와 홍매화 낮이 길어졌다. 태양의 고도도 높아지고... 한낮엔 벌써 초여름처럼 햇살이 따갑다. 뒷공원엔 산수유가 활짝 꽃을 피웠고 홍매화엔 꽃망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길가의 개나리도 망울져 곧 터질 기세다. 지나는 길에 살며시 다가오는 새봄의 길목이 나도 모르게 주머니속 휴대폰을 꺼내게 했다.
춘설(春雪) 며칠 전, 밤새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 커튼을 열고 무심코 바라본 건넛산의 등성이와 머리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해발 573m 봉우리부터 아래로 2~300여 m 눈으로 흰 띠를 두른 것이 사뭇 이국적 풍경이었다.
논산 천호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곳에 세운 사찰이다.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왕 신검으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이다. 전에 보았던 우주정(개태사 부엌에서 쓰였던 무쇠 가마솥을 보호하는 정자 모양의 집)이 있었는데, 그 사이 천막 비닐로 감싼 철확(가마솥)만 남아있고 우주정은 없어졌다. 대신 대웅보전 앞에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을 새긴 커다란 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번 방문에는 본래 개태사가 있던 개태사지와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천호산엔 올라가지 않았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황산으로 산 아래 연산벌이 바로 삼국시대 신라군과 백제군의 격전지였다. 개태사 아래 연산역 북쪽 깃대봉 아래 황산성터가 남아있다. 황산성 밑 ..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으로 1634년 (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 들과 유림들이 창건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2019년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본디 현위치에 가까운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돈암서원 입구의 표지석 홍살문 산앙루 정면 -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유식을 위한 누각이다. 산앙루 후면 산앙루 이층 ..
논산 반야산 관촉사 관촉사에 갔을 때마다 비가 왔었다. 그런 연유로 모처럼 맑은 날 일부러 관촉사로 먼 길을 찾아갔다. 관촉사에 도착했을 때 정오쯤이었는데, 관촉사가 북동향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었나 보다. 일주문에서부터 따가운 남쪽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독한 역광이었다. 가능한 대로 역광을 피해 측광을 이용하려 애썼지만 대체로 사진들이 어두웠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륵전 뒤 석탑과 석등은 가림막을 쓰고 보수 중이었다. 모처럼 찾아간 곳이 보수 공사를 하게 되면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관촉사 경내 마당은 맨땅이라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매우 질척거렸다.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을 이어주는 마당길에 야자매트를 깔아 불편을 해소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엔 등산..
화성 융건릉과 정조 효공원 요사이 며칠 동안 그야말로 북풍한설이 극성이다. 어렸을 때 주기적으로 순환되던 삼한사온이 생각난다. 추운 날이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양지녘 벽에 붙어 햇빛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 시절 손등은 왜 그리 거미줄처럼 갈라지도 터졌는지. 손 튼 데는 안티푸리민이 특효였지만, 그것도 귀해서 터진 틈으로 피딱지가 엉겨 붙어도 참으며 하릴없이 한 겨울을 넘겼다. 삼한사온이 없어진 지 오래된 오늘, 차가운 북풍이 얼굴에 부딪치니 새봄의 훈풍이 더욱 그립다. 날씨가 추운 탓에 하늘이 푸르렀다. 푸른 하늘 덕에 햇볕이 좋아 모처럼 바깥나들이로 오랜만에 융건릉을 찾았다. 몇 년 사이 주변 풍경이 많이 변했다. 용주사와 왕릉 사이에 있던 푸른 초원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흉하게 함석 울타리를 두르더니, 그 울타리가 없어지고..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지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거리에 왕궁리 유적지. 이곳도 예전에 가보긴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흘렀으니, 달라졌겠다. 역시 왕궁리 유적지 박물관이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었던 건물이 새로운 모습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전시되었던 유물들이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본 박물관 안 설비들은 멀티미디어화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것이 백제 수도가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익산 천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터라 박물관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 보았다. 직원분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왕궁리 백제 왕궁은 일종의 행궁이나 별궁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궁궐의 징표로 출토된 와당의 파편에 새겨진 글자가 '수부(首府)'..
익산국립박물관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이동하여 주차장에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입구를 찾느라 한참이나 헤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이가 알려준 곳에 입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예전의 박물관에 갔지만, 그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인터넷 예약 후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옥상에 잔디를 덮은 기다란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이 새로 마련한 익산국립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안내도라도 세웠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박물관에서 기획전시관과 익산 미륵사지와 쌍릉 등에서 발굴된 익산 유적 전시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전시관은 훌륭했으나, 조도가 너무 낮아 글씨 읽기가 어려웠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은 내 불찰이기도 하..
서동요 주인공으로 믿고 싶은 익산 쌍릉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하늘이 맑아 밖에 나왔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늘진 곳엔 잔설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아 익산 쌍릉으로 향했다. 예전에 두어 번 갔었으나, 그 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변화된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서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설화 속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흰 눈이 덮인 능을 바라보며 잠시 전설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내 멋대로 상상에 빠져 보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혈기왕성한 백제 청년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겨울 동학사 모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날씨도 제법 푸근해서 동학사를 찾아 걸었다. 동학사 아래 웬 모텔과 펜션, 음식점들이 그리 많은지 깊은 계곡 법당에서 중생들을 구제하실 부처님도 놀라시겠다. 산중 깊은 절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산수를 벗하며 그윽한 향연 앞에서 부처님 상호를 뵙는 것이 목적일진대, 절 아래에선 세속의 본능들을 굽고 탐하는 난장판이니, 평범한 범생이 중생으로서 불계와 속계의 공존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동학사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는 동계사가 있고, 고려말 충신 포은 야은 목은을 추모하는 삼은각과 조선초 삼촌 수양에게 시해당한 단종임금과 그를 위해 목숨 바친 사육신 생육신 등 351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한데... 시류가 이럴진대 감히 오지랖 펼 처지..
대전 국립 현충원 오랜만에 들린 대전 현충원, 지난해보다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산책 삼아 눈에 익은 현충원 길을 걸었다. 간간히 묘지석 앞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쓸쓸한 겨울 날씨를 대변하고 있었다. 현충탑에 참배한 후, 말도 많고 탓도 많은 독립 유공자 묘역으로 가서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아 묵념으로 고인께 감사함을 올렸다. 그동안 적적했을 장군의 묘 주변에 독립 유공자분들이 빈자리를 메꿔 주셨다. 자신의 삶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치신 분, 그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감사드렸다. 해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암울한 시절인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이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갔던 것이 스탈린의 정책 때문에 머나먼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
화성의 늦가을 바람이 찼다. 비 내린 다음날이라 날씨가 화창하리라 예상했으나, 세고 찬 바람에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어제 비가 덜 내린 모양이다. 스산한 바람에 방문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한산한 화성 풍경이었다. 금년 가을엔 단풍잎들이 제 빛깔을 내지 못하고 시들어 곱은 손가락처럼 쪼그라들어 나무에 붙어 떨어지지 못한 채 말라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나가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까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벽 아래 희고 눈부신 갈대꽃무리들을 상상했으나, 기운 없는 햇살 탓에 갈꽃의 현실은 빛나지 않았다. 하늘의 색깔도 시선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동북쪽 하늘이 맑고 고왔다. 갈숲길을 걸으며 늦가을 한 때를 쓸쓸해 보이는 고성(古城)의 모퉁이에 머물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11월과 12월이 싫다. 낮길이..
부여 왕릉원과 나성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승격되었나 싶다. 웅진 백제 시대 공산성 밖 송산리에 왕릉을 두었듯, 사비성 동쪽 3km 지점에 방어선인 나성(羅城)을 쌓고 성밖에 왕릉을 모셨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었는데, 이곳 능산리에선 왕릉의 주인이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곳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할 뿐이다. 부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전엔 능산리 고분들과 논 아래 습지에 갈꽃들만 무성했었는데, 그 사이 나성과 능산리 사지(寺址)가 발굴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재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긴 했다. 넓게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주차장..
부여 부소산성의 가을 부여만큼 슬픈 도시가 있을까?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성에서 웅진으로, 63년간의 도읍지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력이 쇠할 때마다 쫓겨 다녔다. 종내 122년을 버티던 사비성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망한 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해도 헛된 말은 아니다. 부여는 여러 번 가본 곳이라 그곳의 지리가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계룡시와 논산을 경유하여 갔다. 이른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부여로 갔으니 신라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서진했던 방향과 같은 셈이었다. 논산벌은 들이 넓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옛날에는 그야말..
옥천 읍내 풍경 우리나라 시인 중 시어의 정제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웠다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곳이 옥천이다. 시 향수의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바로 옥천의 옛 풍경이다. 얼룩빼기 황소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젖소로 오해했으나, 우리나라 토종소인 칡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지용 시인은 이화 여전 교수로 재직하다가 6 25 전쟁 때 납북되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종적을 알 수 없다. 한국전전쟁이 예술계에 끼친 비극이다. 아름다운 예술도 정치적 억압 아래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아름다운 그의 언어들도 88 올림픽 이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해금되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와 햇볕을 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
옥천 부소담악 추소정 부소담악은 대청댐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수몰되고 댐 위에 있는 많은 야산들도 물에 잠기게 되면서 생겨난 곳이다. 이곳은 기암절벽의 700여 m 산줄기가 물에 잠겨 산봉우리 능선들이 호수 위에 떠서 뱀처럼 길게 뻗은 형상이다. 그 모양이 연꽃이 연못에 떠 있고 호수에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부소담악(芙沼潭岳)이라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주말 여행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이곳을 검색해보니, 대부분 드론으로 촬영을 한 것들이라 일반 방문자로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어서 방문이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여 불원천리 머다 않고 찾아 나섰다. 산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라 옥천 IC부터는 거북이 운행으로 굽이굽이 돌아 황룡사 주차장까지 갔으나, 평일임에도 방문객들이 몰..
가을 세종 호수 공원 가을빛이 그저 고운 날이었다. 햇빛 따라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노랗게 또는 빨갛게 변해가는 나뭇잎들이 햇볕아래 빛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답다. 점점 짧아지는 낮길이 때문에 서러워지기도 하지만, 동지가 지나면, 또 새봄이 다가서니 감상에만 빠질 이유는 없다.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오늘 하루가 빛날 뿐이다. 멀리 구름 아래로 계룡산 능선들이 아득히 가물거리고 있었다.
불심처럼 그윽한 영평사 구절초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는 끝났지만 구절초들은 막바지인지도 모를 작은 꽃들을 올망졸망 피워내고 있었다. 절정기가 지난 탓 때문인지 영평사 뒷동산에는 이 빠진 듯 구절초들이 성근 곳도 많았지만, 익어가는 가을 속에 부처님의 불심처럼 곱게 피어나고 있었다. 구절초를 심어 꽃동산을 만든 이곳 스님들의 노력으로 영평사는 가을 구절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찰임에도 변화무쌍 변모하는 영평사에는 스님들의 혁신 정신이 그 동력의 원천이 되는 듯하다. 구절초 동산 외에도 추모공원을 만들고, 많은 장독들에 전통 장류들을 숙성시키는 등, 상업적으로도 재정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 순간 지나가는 과객으로서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절 주변의 조경만 보더라도 이곳 스님들의 노력은 기..
계룡산 신원사와 중악단 천도재 갑사에서 가까운 신원사를 찾았다. 신원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고 단아하며 깔끔한 절이다. 동학사와 갑사, 신원사가 계룡산의 대표적인 고찰인데 내 보기에는 그중 신원사가 제일 단아하며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절이다. 백제 말 의자왕 때 창건한 절로 역사가 깊다. 예전에 계룡산 골짜기에 우후죽순처럼 많았던 무속신당들을 철거하자 계룡산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 무속인들이 옮겨 간 곳이 신원사 주변이다.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과 가장 가깝기도 하거니와 산에서 뿜는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 신원사가 아닐까 나름 짐작해 본다. 계룡산 서남쪽에 자리한 신원사는 조선시대 중악단을 두고 산신께 제사 지냈다. 조선조 때 묘향산에 상악단을, 지리산에는 하악단을 세워 국가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
계룡갑사의 가을 기상하여 커튼을 제치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완연한 가을이다. 기온도 뚝 떨어져 아침 온도가 10도 안팎이다. 간단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계룡산이 가까워지면서 닭볏 같은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언제 보아도 참으로 신묘한 형상이다. 제법 눈에 익은 갑사 가는 길이었음에도 주차장 근처에서 내비게이션이 심술을 부렸다. 좁은 편도 일 차선에서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탓에 잘못 들어섰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 했다. 펜션들이 즐비한 마을의 좁은 길을 돌고 돌아 주차장에 들어섰다. 어젯밤까지 내린 보슬비 때문에 갑사로 가는 길 위에 젖은 낙엽들이 쌓여 있었다. 송풍기로 낙엽들을 날리는 굉음과 휘발유 타는 냄새가 요란했다. 시간을 두고 조금만 참으면 저절로 말라서 ..
여주 남한강 영월루(迎月樓) 영월루는 신륵사에서 여주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날 수 있는 커다란 누각으로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어 누각 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풍경이 그윽하다. 신륵사 방향에서 봐도 벼랑 위 숲 사이에 우뚝 솟은 그림 같은 누각이 남한강의 운치를 한층 더 북돋운다. 여주박물관 신관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카페 안 인공수조에 비친 영월루 풍경은 선경에 가깝다. 이름 그대로라면 달맞이하는 누대인데, 달이 더오른 달밤에 맞이하는 풍경은 더욱 운치 있을 것 같다. 남한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황포돛배는 마치 과거로 거슬러 가는 착각을 느낄 만큼 한적하고 여유롭다.
여주 봉미산 신륵사와 강월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신륵사였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신륵사엔 주변부터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기 때문인지 식당을 찾아들었으나, 주인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로 요기하고 신륵사 경내로 들어갔다. 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는데,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매표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 신륵사에도 징수하던 관람료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신륵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고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들어가서 두 번 실망했다. 첫 번째는 가람막을 씌우고 범종각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신륵사 좌측면 바위 위 강월헌 정자 주변에 추락 위험이라 적은 현수막과 정자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어설프게 둘러친 금줄 때문이었..
여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세종대왕 英陵에서 옆 숲길을 따라 효종대왕의 寧陵으로 걸어갔다. 이른바 왕의 숲길이었다. 700여 m 거리의 숲길은 우람한 적송들이 우거진 가운데, 인적조차 없어 고요하고 정감이 있어 운치가 있었다. 효종은 인조 4년(1626), 8살에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에 조선이 항복한 탓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었다. 인조 23년(1645) 5월, 귀국한 후, 1개월 만에 형인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고, 4년 후 인조 27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면서,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17대 왕으로 즉위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을 주창하며,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졌으나, 39세로 재위 10년 만에 아깝게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