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종묘 북신문을 지나다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아침부터 해가 이글거렸다. 넓은 차양 달린 모자를 쓰고 햇볕을 가리는 우산까지 준비해 갔으나, 우산을 통과한 태양열도 보통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너무 더워 방문객이 별로 없어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국인은 거의 없었고, 외국 관광객들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관람하고 있었다. 이전 방문 때 정전 보수 공사가 한창이라 가림막 안의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없어 이번 방문에 기대가 컸다. 더욱이 알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 큰 도로를 내어 끊어놓은 것을 터널로 덮어 창덕궁 창경궁과 다시 이었다. 그 길로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렘까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임에도 종로 3가 길 건너 세운상가 재개발로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크다. 서울시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네스코에서 반대하는 초고층 건물을 극구 세우려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사유재산 보호가 국가 유산보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인지 되묻고 싶다. 개인자격으로나마 1심에서 받은 유죄판결이 제발 대법원까지 이어져 확정되길 간절히 바란다. 자격 없는 인사를 시장으로 다시 뽑아 준 시민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물욕이 정신적 가치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아무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운상가 재개발이 종묘를 가리지 않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마감되기 바란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에 비견되는 종묘인데, 파르테논 언덕 아래 초고층 상가들을 세운다면 세상사람들은 과연 뭐라고 평가할까. 눈 앞의 보물을 못보고 먹을 것만 쫓는 어리석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렀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五廟制)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조·부)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別廟)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이후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世室, 대대로 정전에 신주를 모심)’과 ‘조천(祧遷,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김)’의 예로 신주를 모셨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祔廟禮,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 때 정전에 처음 신주를 모시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하여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되어 현재의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그 밖에 종묘 경내에는 망묘루, 향대청, 재궁, 전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종묘 홈페이지>

 그러고 보니 세종대왕이 지은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해동 6룡도 중국 제후국으로서 5묘제에 따른 것이었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이 이른바 육룡인데, 개국시조 태조와 그의 4대조를 언급한 것은 바로 제후국 오묘로 스스로 조선을 낮춰 사대하면서 역성혁명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고사와 세종의 6대조의 행적을 짜깁기한 것이다. 조선의 사대정책이 이땅에 뿌리깊은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일본을 사대하다(아직까지 친일파들이 들끓고 있긴 하지만), 일본 패망 이후부터 승전국인 태평양 건너 미국에 빌붙어 사대하니 국가의 존엄이 스스로 비루해지고 있다. 이 땅에 전쟁이 나도 우리 군대를 스스로 지휘할 수 없는 나라. 한 술 더 떠서 근본 잊은 검은 머리 미국인들이 왈리 왈시하는 현실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종묘 입구 - 오른쪽에 하마비가 있다.

 

종묘 의대문 왼쪽에 있는 월남 이상재 (1850~1927) 선생 동상 -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이다. 1888년에 주미 공사 서기로 부임하였으며 귀국 후에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서재필과 독립 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삼일 운동 후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1906년에 기독교 청년회장이 되었다. 1907년에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출입문인 의대문, 또는 외삼문이라고도 한다.

 

숲속의 관리사무소

 

중연지 뒤 망묘루(望廟樓) - 종묘서(宗廟署)의 관원들이 제례에 관한 업무를 보던 곳이다.

 

망묘루 - 뒤에 고려왕조 공민왕 신당이 있다.

 

향대청(香大廳) - 오른쪽 사진, 향과 축문, 제기 등 제례용품을 보관하는 곳 

 

재궁(齋宮) - 왕과 세자가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왕과 세자가 이곳에서 목욕제계하고 의관을 갈아입었다. 왕과 세자는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가 정전의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간다.

 

담으로 둘러싸인 정전

 

정전의 오른쪽 출입문과 전사청(典祀廳) -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곳

 

동문과 수복방

 

전사청과 우물-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곳

 

정전의 좌측 회랑

 

정문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정전 -  좌우 대칭 구조로 가로길이 101m로 장엄하다. 조선 건축의 최고로 평가된다.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으로, 그 건축 양식은 최고의 격식을 갖춘다.  현재 정전에는 서쪽 제1실에서부터 19분 왕과 왕비의 신주를 각 칸을 1실로 하여 모두 19개의 방에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나라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홑처마에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의 둥근기둥이고, 정남쪽에 3칸의 정문이 있다.

종묘 정전은 선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으로 구현한, 조선시대 건축가들의 뛰어난 공간창조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전의 정문

 

정전 오른쪽 월대 아래에서 보는 정전 

 

정전 악공청


영녕전 -조선 초 종묘

 

영녕전 대문

 

영녕전 -  조선전기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이안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985년 보물로 지정하였다. 종묘 영녕전은 1421년(세종 3)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이 부족하여 별묘를 건립하여 태조의 4대조를 함께 옮겨 모신 곳이다. 이후 정전에 계속 모시지 않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대에 재건하고 이후 현종과 헌종 대에 중수하였다. 현재 영녕전에는 중앙의 4실을 양 협실(夾室)보다 높게 꾸미고 각 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쪽 제5실에서부터는 정종(定宗)과 왕비, 문종(文宗)과 왕비, 단종(端宗)과 왕비, 덕종(德宗)과 왕비, 예종(睿宗)과 왕비, 인종(仁宗)과 왕비, 명종(明宗)과 왕비, 원종(元宗)과 왕비, 경종(景宗)과 왕비, 진종(眞宗)과 왕비, 장조(莊祖)와 왕비,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와 태자비 등 32위의 신주를 제16실에 이르기까지 모시고 있다.

 의례(儀禮)를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에는 특히 왕가(王家)의 조상신(祖上神)을 제사 지내는 종묘를 중요시하여, 건축 형식도 엄격하게 규정된 제도를 따르게 마련이었다. 즉, “천자(天子)는 7묘(廟), 제후(諸侯)는 5묘”라고 제도화되어 있었고, 이를 원형으로 삼아 종묘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증건이나 신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세종대에 이르러 정종이 죽자 그의 신주를 모실 방이 없어서 이미 정전에 모셔져 있는 4조(穆祖 · 翼祖 · 度祖 · 桓祖)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정전 서쪽에 별묘를 두는 송나라의 제도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고 하여 채택하였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창건하게 된 동기이다. <네이버 지식 백과>

 

종묘 뒤 복원한 북신문-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문. 영녕전을 우회해서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내 생애 처음 통과하려는 문이다. 공휴일과 토 일요일에만 개방한다. 드디어 저 문을 통과해서 창경궁으로 들어간다.

 

종묘 안내도 - 궁릉 유적 종묘 홈페이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