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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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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명당 남연군 묘 모처럼 날씨가 쾌청했다. 어젯밤에 비가 온 탓인지 티끌 먼지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집콕하기엔 너무 아까운 날이어서 외출을 감행했는데, 인적 없는 곳을 고르다 보니 덕산에 있는 남연군 묘가 생각났다. 영화 '명당'이, 이 묏자리를 두고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이 암투를 벌리는 내용이던데, 대원군은 그의 후손 두 명이 왕이 될 자리라는 풍수쟁이의 말을 듣고, 본디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이 있던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멀리 연천에서부터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묘자리는 왕을 배출하기는 하지만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달이 우선이었던 대원군은 기어코 아버지 남연군(1788∼1822)의 묘를 쓰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혜빈 홍씨와 ..
화성 융건릉 아침에는 날씨가 흐리더니, 오후에 햇살이 쨍하게 내비치었다. 바람이나 쐬려고 화성 융건릉에 나갔다. 동탄 병점 인근 회사원 가족들이 다 나왔나 보다.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어서 차를 빙빙 돌리다, 근처 음식점 주차장에 두고 융건릉 안으로 들어갔다. 엊그제만 해도 추워서 떨었는데, 벌써 한여름이 찾아왔다. 봄옷을 걸치고 나갔음에도 더위를 주체할 수 없어 헉헉거렸다. 코로나 방역 마스크 덕에 숨 쉬는 게 더 힘들었다.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융건릉 관리 사무소에서 방송으로 마스크 쓰고 2m 거리를 유지하라고 계속해서 안내 방송을 하던데, 방송도 형식적이었고 관람객들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답답함에 시원한 자연을 즐기러 나온 것은 이해되지만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 것이나, 방심해서 잊고..
화성시 용주사, 융건릉 가을 날씨답게 하늘이 푸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입방정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을 관통하는 태풍 탓인지 모처럼 푸른 하늘이 이어지고 있다. 맑은 하늘 덕에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용주사에 도착하니 주차된 관광버스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사진 찍기가 어려워진다. 매표소에서 약간 실랑이를 하고 현금으로 인장권을 샀다. 대부분 절간에선 카드를 받지 않는다. 며칠 전 불국사는 전과 달리 카드결제를 하고 있더만... 현금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지갑을 탈탈 털어 천 원짜리들을 모아서 입장료를 내며 싫은 소리를 했더니 매표소 직원은 처음엔 결제시스템이 없어서라더니 나중엔 윗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뿐이랬다. 스님들의 현금 사랑이 ..
보길도 세연정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 진작부터 고산이 살던 보길도를 찾아보려 했으나, 마음뿐이었었다. 친구 따라 진도에 갔던 길에 막간의 짬을 내어 드디어 보길도에 들렸다. 그동안 마음만 있었지 정보가 거의 없어서,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고산이 부용동에 살았다는 흐릿한 기억에 그곳을 검색했지만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윤선도 유적지라는 원림을 찾아내곤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원림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 아침 일찍 도선하여 쉴 새 없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원림 개장 시간을 맞추기 위해 차선책으로 해안을 따라 보길도 땅끝전망대까지 가고 오면서 과거 어부사시사를 짓던 어촌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21세기 보길도 주변은 과거 조선시대 양반들이 유유..
영경묘 준경묘 주차장에서 북방 3km 지점에 있는 이성계 고조모의 묘로 준경묘의 짝이다. 준경묘와 달리 2차선 포장도로에 인접해서 찾기가 수월하다. 짧은 안목으로 평할 것은 아니지만 산세는 준경묘자리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영경묘 앞은 황장목과 잡목들로 우거져 있는 거친 골짜기로 평지가 없다. 준경묘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영경묘의 방향은 남서쪽으로 준경묘를 바라보는 형세였다. 하필이면 이 거친 곳에 묘를 썼을까 의아심이 들었는데, 영경묘 봉분 뒤에 오르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묘 바로 앞은 거친 골짜기였지만, 멀리 내다 보이는 안산의 능선들이 첩첩이 쳐놓은 울타리처럼 영경묘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형세였다. 골짜기가 험해서인지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기립한 황장목들이 울창하다. 준경묘역보다도 더 많은 황장..
삼척 준경묘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준경묘, 묘를 잘 쓴 덕에 오백 년 조선왕조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야반도주해서 살다가 도승을 만나 아버지 묘를 쓰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이곳 준경묘이다. 야사에 의하면 전주호족이었던 이안사는 전주관기를 사랑했었는데, 때마침 전주로 부임해 온 사또 역시 그 기생을 좋아하게 되었단다. 분을 참지 못한 이안사가 사또를 두들겨 패고는 그 기생과 집안 식솔들을 이끌고 삼척으로 도망했다. 삼척에 정착해서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신임사또 부임소식에 관아의 담너머로 사또를 보니 전주에서 두들겨 팼던 그 사람이었다. 지난 악연에 후환이 두려워 사또의 눈을 피해 고려 조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함경도 변방으로 식솔들을 데리고 다시 이주했다. 그곳..
융건릉 가뭄과 메르스로 고통받는 나날이지만 모처럼 푸른 하늘에 구름이 좋은 날이었다. 장마 탓으로 비가 좀 내린 탓이었을까, 시계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융건릉을 찾았는데, 뜨거운 한낮의 뙤약볕과 메르스가 전혀 잦아들지 않았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융건릉 숲을 즐기고 있었다. 숲 속그늘에선 몰랐으나, 햇빛 속에서는 너무 뜨거워 마치 목털미가 불타는 듯했다. 구름이 많은 탓에 햇살이 숨바꼭질 하긴 했으나, 사진 찍기엔 매우 좋은 날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가 아버지 묘를 잘 쓴 덕인지, 사도세자는 비명에 죽었으나, 영조대왕 이후의 조선의 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다. 정조대왕을 정점으로 융성했던 국운도 대비를 둘러싸고 벌어진 세도정치로 쇠하여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정몽주 묘 요즘 세월호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TV 보는 즐거움이 있다면 류현진 중계방송과 드라마 정도전 덕분이다. 내일모레면 자치단체장들의 윤곽이 나올 것이나, 그들의 유세 소식을 다루는 기사나 뉴스가 볼썽사나워 TV 켜기조차 두렵다. 시민들을 위한 정책보다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면, 어찌 저런 후보가 과연 시장이나 도지사가 되어 시민들의 공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쟁쟁한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이 저럴진대, 힘없는 서민 하나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골로 보내는 건 여반장이겠다. 아예 자질조차 의심스러운 언행으로, 시장을 발판 삼아 장차 대통령까지 하겠다는데, 향후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으려는 근시안적이고 후안무치한 그들의 행태에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다. 거기에..
예산군 남연군묘 꺼져가는 촛불처럼 조선의 기운이 쇠락해 가던 시절, 자신의 야망을 감추고, 시정잡배 파락호로 위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하응(1820~1898). 그는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앞날을 내다보며, 자신의 후손을 왕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하응은 풍수설의 신봉자로, 지관 정만인에게 아버지 남연군의 묏자리를 의뢰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풍수쟁이였던 정만인은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를 일러주며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단다. 이에 이하응은 1846년 가야사를 불태워 없애고, 이미 경기 연천에 모셨던 아버지의 묘를 가야사 탑이 있던 자리로 이장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둘째 아들 명복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조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임..
정암 조광조 선생 묘 조선조 중종 때 도학정치를 펴다, 훈구파의 모함으로 사사되었던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는 용인 수지구 상현동에 있다. 불과 이십 여전 전에만 해도 한적한 시골길이었을 상현리 산자락이 이제는 고층 아파트로 둘러 쌓여 있다. 더구나 광교 신도시에 상현동 일부가 편입되어 교통량이 늘어나고, 고층 아파트 울타리에 갇혀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한양조씨 묘역에 정암선생의 묘가 맨 윗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문의 위계보다는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묘 자리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파주 율곡선생 묘도 이와 비슷하게 선생의 묘가 조상들의 묘보다 윗자리에 있었다. 권력이 뭔지 권력을 놓고 벌이는 암투가 사람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긴다. 권력을 뺏기 위한 권모술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정암을 모함하기 위해 궁궐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세종의 장인, 심온의 묘 광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선생의 묘도 예쁘고 때깔나게 단장되었다. 진작에 찾아본다는 것이 이제서야 가보게 되었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있어서 눈밭속을 헤매다 돌아온 꼴이 되었다. 공원화되고 있는 묘역과 사당도 아직 마무리가 덜 되어 있었다. 심온은 왕의 장인으로 부귀영화를 한껏 누릴 수 있던 자리에서, 졸지에 모함을 받아 사위의 아비인 태종에게 마흔네 살에 사사되었다. 그의 딸 소헌왕후도 속앓이가 많았던 비운의 왕비였다. 왕비가 되자마자 그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고, 그 어머니는 관노비로 전락하였다. 살아생전에 많은 아들과 딸들을 낳았으나, 둘째인 수양대군은 왕권에 눈이 멀어 후에 계유정란을 일으키고 그의 친동생인 안평을 죽였고, 왕이 돼서는 왕위보전을 위해 ..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지난 겨울에 가보고 싶었던 준경묘였다. 그때, 지척까지 갔다가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안타깝게 포기했었다. 태백에서 내비게이션(지니맵)에 준경묘를 입력하고 달렸으나, 도착한 곳은 비포장도로의 끝지점인 시멘트 광산 본부 사무실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으나 이정표 하나 없는 첩첩산중이어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어서 비탈을 오르는 시멘트 구비길을 200여 미터 오르니 현장 숙소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 차소리에 잠을 깬 현장 직원들이 놀래서 밖으로 나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종종 내비게이션 오류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준경묘는 이 산의 반대편에 있단다. 산을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고 멀지 않으니 활기리 마을회관을 찾으면 될 것이라는 말에 차를 되돌려 또 달리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