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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세종의 장인, 심온의 묘

광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선생의 묘도 예쁘고 때깔나게 단장되었다. 진작에 찾아본다는 것이 이제서야 가보게 되었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있어서 눈밭속을 헤매다 돌아온 꼴이 되었다.  공원화되고 있는 묘역과 사당도 아직 마무리가 덜 되어 있었다. 심온은 왕의 장인으로 부귀영화를 한껏 누릴 수 있던 자리에서, 졸지에 모함을 받아 사위의 아비인 태종에게 마흔네 살에 사사되었다. 

 

  그의 딸 소헌왕후도 속앓이가 많았던 비운의 왕비였다. 왕비가 되자마자 그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고, 그 어머니는 관노비로 전락하였다.  살아생전에 많은 아들과 딸들을 낳았으나, 둘째인 수양대군은 왕권에 눈이 멀어 후에 계유정란을 일으키고 그의 친동생인 안평을 죽였고, 왕이 돼서는 왕위보전을 위해 또다시 여섯째 동생 금성을 살해했다. 소헌왕후가 일직 돌아갔기에 망정이지, 생전에 수양의 패륜을 보았더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소헌왕후는 1446년 타계했고, 계유정난은 1453년 일어났다.)

 

  좌우지간,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었고,  조선 세종 때, 좌의정과 영돈녕부사를 지낸 안천보(安天保)의 사위이고, 태종의 처남이자 세종의 외숙부인 민무휼과 사돈지간이다. 심온의 아들 심준과 심회가 각각 민무휼의 딸들과 결혼했다.  또, 심온은 태종의 장인 민제의 사위 우의정 노한(盧閈)과도 사돈지간이다. 노한(盧閈)의 아들 노물재가 심온의 사위이다. 심온은 민제의 아들 민무휼과도 사돈지간이고, 민제의 사위 태종과 노한(盧閈)과도 사돈지간이니, 민제와 심온은 기묘한 삼중 사돈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심온의 집안 내력으로 본다면 가히 로열 패밀리로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기도 했겠다.  이런 인척 맺기가 화를 불러 태종의 노여움을 샀는지도 모르겠다.  태종 이방원은 그가 왕이었을 당시 그를 도와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처남 민무구와 무휼 형제도 죽였다. 행여 태종 자신이 죽은 뒤, 외척들이 왕권을 어지럽힐까 염려한 탓이었다. 그랬던 태종이었던 만큼 심온의 화려한 인맥 맺기도, 일찌감치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렸는지 모를 일이다. 이른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아닐 수 없다.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1418년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심온은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 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음력 9월에 세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明)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떠났다. 그 때, 태종에 대한 불경죄를 이유로 심온의 아우 심정 등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좌의정 박은 등의 무고로 인해, 아우 심정이 처형당하고,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심온도 의주부(義州府)에서 체포되어, 한양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음력 12월 25일 수원(水原)에서 사사되었다. 심온 일가는 그의 외손자인 문종에 의해 무고로 판명되어 복권되었다.

 

  소재지 :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입구

 

 

아직 붉은색이 칠해지지 않은 홍살문

 

비각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사당 안효사

 

사당 앞 광교 신도시

 

봉분으로 오르는 계단

 

 

장명등과 묘표, 墓表는 외손자인 안평대군이 썼다고 한다. 

 

묘역과 그 앞 전경

 

사당

 

묘역 전경

 

 

  안내문 영문 소개가 웃긴다. 심온 티처의 무덤이라고 떡 써 놓았다. 심온을 교사라고 옆에 있는 한글을 직역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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