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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지난 겨울에 가보고 싶었던 준경묘였다. 그때, 지척까지 갔다가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안타깝게 포기했었다.

 

 태백에서 내비게이션(지니맵)에 준경묘를 입력하고 달렸으나, 도착한 곳은 비포장도로의 끝지점인 시멘트 광산 본부 사무실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으나 이정표 하나 없는 첩첩산중이어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어서 비탈을 오르는 시멘트 구비길을 200여 미터 오르니 현장 숙소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 차소리에 잠을 깬 현장 직원들이 놀래서 밖으로 나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종종 내비게이션 오류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준경묘는 이 산의 반대편에 있단다.

 

 산을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고 멀지 않으니 활기리 마을회관을 찾으면 될 것이라는 말에 차를 되돌려 또 달리고 달렸다. 조금 가면 된다는 길이 20여 분을 달려도 나타나지 않아 강원도 종합박물관에서 그곳 직원에게 길을 물었더니, 조금 더 가면 이정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미덥지 않은 마음으로 차를 달렸는데, 곧 이정표가 나타났다.  활기리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공사 중 차량진입금지 푯말이 가로막고 서있었다. 차에서 내려 마을길을 타바타박 걸으니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 뒤로 강원도 산골의 전형적 비탈길이 나타났는데, 그 길이 준경묘로 가는 길로 짐작되었다. 주차장 이정표엔 준경묘까지 1.8 Km란다.

 

 가파른 비탈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개에 오르니, 먼저 가던 길손이 고갯마루에서 땀을 훔치며 쉬고 있었다.  한적한 산길이라 먼저 인사를 하니 서로 간에 궁금했던 말문이 터졌다. 사진 촬영차 4번째 방문이라는 나그네의 표정이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였다. 무거운 카메라 백팩을 지고 한 손엔 덩치 큰 삼각대를 들고서 홀로, 외진 이 숲길을 걷는 나그네가 대단해 보였다. 고개 넘어서 이제부터 평지라는 말에 안도하며 하늘로 쭉쭉 뻗은 적송이 우거진 깊은 산길로 깊이 들어갔다.  솔향기 그윽한데 이름 모를 산새들만 바쁘게 때 이른 아침을 맞고 있었다.

 

  500년 이전엔 더 깊은 산골이었을 이곳에 터를 잡고 묘를 썼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곳에 묘를 쓴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인 이안사(李安社)다.  고려시대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인(李隣)은 1174년(명종 4) 그의 형 이의방이 피살되자 전주로 낙향했는데 이안사는 그의 손자이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는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과 크게 싸운 후에 별감의 후환을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야반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으므로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무리를 이루었는데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그 후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원나라에 투항하여 관직을 받았고 20여 년간 요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그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김으로써, 증손자 이성계의 세력기반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안사가 삼척에 살 때 고승으로부터 백우황금관(百牛黃金棺)으로 묘를 쓸 명당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고 한다. 백 마리의 소는 마련할 수 없어 흰 소(白牛)를 썼고, 황금관 대신에 붉은 귀리관을 써서 부친을 모셨는데, 이 묏자리 덕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야말로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1. 준경묘

 

 

  산길 끝자락 부분에 탁 트인 개활지가 나타나고, 준경묘 표식이 나타났다. 날씨가 흐렸지만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보통의 지형은 아닌 듯했다. 구부러지고 뒤틀어진 소나무 하나 없이 모두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솟은 적송들이었고 그 소나무들을 병풍 삼아 준경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준경묘 표식. 아름다운 숲으로 표창받은 바 있다는 글이 적혀 있다.

 

  준경묘 초입

 

  고종 황제 때 중수되었다는 안내문

 

  산길로부터 준경묘로 들어오는 길

 

  보통의 홍살문에 정자각대신 맞배지붕의 3칸짜리 사당이 정면으로 보이고, 측면으로 서있는 것은 비각이다. 

 

  사당 뒤에서 바라본 준경묘. 오르는 길 좌측에 우물이 있었는데, 뚜껑을 덮었다. 우물의 물은 호수로 연결하여 사당 옆, 거북이 석상의 입으로 흐르게 하였다. 

 

돌 축대 위에 준경묘 봉분이 있다. 축대와 봉분이 너무 넓어 합성한 파노라마. 실제로는 사진보다 폭이 더 넓다.

 

봉분 끝지점에서 바라본 준경묘 전경.  정자각 오른쪽에 앉은 것은 거북석상으로 만든 샘이다.

 

  준경묘 주변의 꼿꼿한 적송들... 흔히 금강송이라고 말한다고 하지만, 애초에 금강송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없던 말이라고 한다. 일본인 학자가 한반도의 적송을 금강송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와전되어 저런 소나무를 특별한 소나무나 되는 것처럼 금강송 어쩌고 저쩌고 한다고 한다. 새로 복원한 광화문 현판이 6개월도 되지 않아 쩍 갈라졌는데, 그때 가짜 금강송이니 어쩌니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갈라진 이유는 덜 말랐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금강송이라는 이름보다는 안내문의 명칭대로 황장목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준경묘를 떠나면서 아쉬움에 뒤돌아 보며 내 마음속에 풍경을 곱게 담아 보았다. 언제 다시 찾아와 볼 수 있을까.

 

 준경묘 직전 산자락에 있는, 충청도 보은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송과 혼례한 소나무 표식. 소나무 혼례 이야기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오직 하늘만을 향해 솟은 기품이 늠름하기만 하다. 

 

 준경묘에서 활기리 마을로 나가는 길 

 

 

2. 영경묘

 

  준경묘에서 나와 영경묘를 향했다.  준경묘에서 약 10리 정도의 거리일 듯싶다. 준경묘산도에 의하면 준경묘와 영경묘 사이에 재실이 있고, 재실에서 준경묘는 5리 영경묘는 4리라 기록하였다. 자동차로 가는 도중에 재실을 지났고, 또 이들이 살던 구거터를 지나고, 작은 개울 위 다리를 건너니 영경묘 표지가 나타났다. 도로로부터 200m란다. 안내표지를 지나 계단을 올라 이안사(목조)의 어머니 영경묘를 대면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정자각과 비각만 보일 뿐 능침이 보이지 않았다. 정자각 가까이 다가가자 왼쪽으로 영경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 바로 아래 거북이 석상의 샘이 있어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 소나무 우거진 숲을 한구비 돌아가니, 오솔길 위에 긴 축대를 쌓고 올린 영경묘가 길게 앉아 있었다. 영경묘 앞에 정자각을 놓을 자리가 없어 한 등성이 돌아서 사당과 비각을 세웠나 보았다. 풍수에 문외한이라서인지 내 안목으로는 준경묘에 비해 썩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영경묘를 둘러싼 적송숲이 아름다웠다.     

 

  차도에서 옆으로 난 작은 시멘트 다리 건너에 있는 영경묘 안내문. 안내판  뒤로 언덕을 오르면 영경묘 사당과 비각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비각뿐 능침이 보이지 않는다.  정자각 부근에 이르자 왼쪽에 영경묘 100 미터란 이정표가 있었다.

 

  정자각 뒤편 왼쪽으로 송림 우거진 숲 속을 한 구비 돌아 100여 미터쯤 가니, 긴 축대 위에 앉은 영경묘가 보였다. 축대 아래로는 산맥이 뚝 끊어져 평지가 없고 숲으로 가득 찬 골짜기였다. 

 

  영경묘 좌측 끝자락에서 바라본 전경

 

 영경묘역 정면에서 바라본 묘역, 여러 장을 합성한 파노라마. 준경묘처럼 사진보다 상당히 넓다.   

 

  묘역 맨 위에서 앞쪽으로 내다본 전경, 멀리 안산으로 두타산 능선이 지나고 있었다.

 

  영경묘를 나오면서 정자각 옆에 있는 거북석상 샘물에서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준경묘와 영경묘산도

 

 

海東 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    <용비어천가 1장>

 

  영경묘산도를 보아도 내 보기에는 준경묘보다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 짧은 식견엔 준경묘 자리에 합장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조선의 창업을 인도한 최고의 명당을 둘러보았다. 산세보다는 주변에 울창한 황장목 꼿꼿한 소나무 숲이 아름다웠다. 우리의 산들이 이런 나무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인물들도 저런 소나무들을 닮아 국가의 동량으로 커가길 바라면서, 동해의 작은 마을 삼척이 작은 마을이 아닌 바다와 산을 아우르고 한반도를 품어, 크고 너른 고장으로 생각되었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해동 육룡의 첫째인 목조 이안사, 그의 부모의 묘가 바로 준경묘와 영경묘,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아름다운 명당자리로 보였다. 좋은 묏자리로 후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산 많고 물 맑은 우리 강산이기에 풍수설도 발전했으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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