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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정몽주 묘

 요즘 세월호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TV 보는 즐거움이 있다면 류현진 중계방송과 드라마 정도전 덕분이다. 내일모레면 자치단체장들의 윤곽이 나올 것이나, 그들의 유세 소식을 다루는 기사나 뉴스가 볼썽사나워 TV 켜기조차 두렵다. 시민들을 위한 정책보다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면, 어찌 저런 후보가 과연 시장이나 도지사가 되어 시민들의 공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쟁쟁한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이 저럴진대, 힘없는 서민 하나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골로 보내는 건 여반장이겠다. 아예 자질조차 의심스러운 언행으로, 시장을 발판 삼아 장차 대통령까지 하겠다는데, 향후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으려는 근시안적이고 후안무치한 그들의 행태에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다. 거기에 부회뇌동하는 떼거리들도 한심스럽긴 마찬가지이다.

 

  KBS 채널에서 유일하게 시청하는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작가와 연출가, 배우들의 열정에 감사한다. 다른 사극 드라마보다 사실적이고 역사적 고증도 탄탄해 보인다. 게다가 빠른 전개도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결말이 아쉽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인 정도전보다도 정몽주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피상적 상식으로 고려말 유약한 충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를 통해서 고려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던 강직한 성품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가 정도전보다 이성계를 먼저 제거했더라면 고려왕조를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꺼져가는 불길처럼 희망이 없던 고려왕조이긴 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바탕으로 이성계를 부추겨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 그는 조선의 개국과 새왕조에 걸맞은 제도를 마련한 일등 창업공신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이방원을 권력서열에서 도태시켰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타살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에 반대하고 고려를 지키려다 죽은 정몽주는 새 왕조에서 충신으로  추앙되고, 오히려 이성계를 도와 나라를 창업하고 그 기반을 마련했던 그가 조선 내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천대받았던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몽주는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를 세울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寶)와 송악산(松嶽山)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豊德)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되었다.

 

  그 뒤 1517년(조선 중종 12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중종에게 청원하여 정몽주의 비석을 세울 때 묘비문의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암각하였다. 동생 정과는 1392년 4월 이성계의 반정세력에 의해 정몽주가 죽을 때 함께 화를 당했고, 동생 정도는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아들들에게까지 연좌시키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지 9년 후인 1401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의 문하생 중 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된다.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그는 간신(姦臣)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녀 중 한 명은 정종의 다섯째 서자와 결혼했고, 그의 제자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을 거쳐 사림파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권우는 세종대왕과 정인지의 스승이 된다. 태종은 왕조가 확립된 후 왕실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탄하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로 인식되었다.

 

  그의 사후 태종은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를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 세종은 즉위 후,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 편에 정몽주를 수록하여, 부왕 태종 이방원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시켰다.  <위키 백과에서 일부 발췌>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소재 정몽주선생 묘 입구 홍살문

 

영모재 근처에서 바라 보이는 묘역

 

묘역 입구, 정면으로 보이는 묘역은 영일정씨 시조묘를 비롯한 문중의 묘이다. 

 

 

 

우측은 문중의 사돈인 연안이씨 이석형의 묘, 가운데가 포은의 묘, 좌측은 정씨 문중의 묘역이다.

 

 

 왕릉처럼 중수된 포은의 묘, 70년대, 인근의 문중 땅을 골프장에 팔아 서울에 호텔을 짓고, 포은의 묘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여 왕릉처럼 꾸몄다. 봉분 주변으로 석축을 쌓고 장명등과 상석, 문인석들 새로 세웠다. 앞에 있는 작은 문신석은 고려 때의 복식이며, 그 뒤 장대한 문신석이 새로 세운 석상이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고 해서 존경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닐 텐데, 왕릉처럼 거대하게 꾸민 모습에서 오히려 속물적인 분위기가 반감을 일으킨다.

 

 묘비문 전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 암각하였다. 

 

  묘에서 바라본 영모재와 입구 방향, 야트막한 산 너머에 포은의 사당인 충렬서원이 있다.

 

 영모재(永慕齊), 담장 안 건물 기둥에는 숙종이 포은을 찬양하여 지은 싯구가 적혀있고 방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영모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묘앞에는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연못을 파 놓고 수련을 띄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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