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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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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의 가을 부여만큼 슬픈 도시가 있을까?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성에서 웅진으로, 63년간의 도읍지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력이 쇠할 때마다 쫓겨 다녔다. 종내 122년을 버티던 사비성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망한 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해도 헛된 말은 아니다. 부여는 여러 번 가본 곳이라 그곳의 지리가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계룡시와 논산을 경유하여 갔다. 이른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부여로 갔으니 신라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서진했던 방향과 같은 셈이었다. 논산벌은 들이 넓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옛날에는 그야말..
치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남한산성 권력욕에 눈 먼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로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축출하고 능양군이던 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명분을 주장하며 오직 대명(大明)만을 사대하는 정책으로 몰아갔기에 두 번의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왕은 왕대로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으며,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거나 삭풍이 부는 오랑캐 나라로 끌려갔다. 반정 후 논공행상을 빌미로 북방을 지키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훈련된 군사들을 잃은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괄의 쿠데타로 공주까지 도망간 인조로서 국방을 강화하기보다는 장수들을 견제하는데 힘써,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난리가 나면 임금이 도망하는 것이 우리나라 지도자의 유..
논산 노성산성 작년에 갔었던 황산성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으리란 희망으로 노성산성을 찾았다. 그러나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보수하려 노력은 한 것 같았으나, 새로 쌓은 성벽 부분을 사각으로 쪼아낸 돌로 축대 쌓듯이 만들어 성의 없어 보였다. 문화재청에 공사 감독관도 돌아보지 않았을 성싶었다. 이정표도 없어 올라가는 길에 성이 무너진 흔적인지 돌무더기인지도 모를 돌담 성벽길을 지나 정상까지 올라갔다. 신라와 백제군이 최후의 접전을 벌였다는 황산벌의 요충지인 노성산성과 황산성 관리가 허술하단 것은 일단 문제라고 본다. 2015년 지정된 유네스코 백제 역사지구가 눈앞에 보이는 곳만 치장하여 관광지로 홍보하면 그만인지 지자체 탁상행정의 표본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논산지역은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현..
부여 가림성 사랑나무 강경에서 부여 임천면에 있는 가림성은 먼 길이 아니었다. 자동차 네비에 가림성 사랑나무를 검색했으나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아 주소 검색을 했지만 역시 없었다. 가림성이 검색어에 등록되어 있어서 목적지를 설정하고 달리는데, 오른쪽 산에 성벽과 느티나무가 보였다. 성곽을 우회하여 뒤편으로 가는 줄 알고 열심히 찾아갔으나 우습게도 목적지로 안내한 곳은 "가림성"이라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어이가 없어 핸드폰 앱으로 검색했더니 가림성 사랑나무가 훨씬 뒤쪽에 있었다. 결국 왔던 길을 한참 되돌아가 큰길 아래로 좌회전하여 임천군 면사무소 앞을 지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산길이 좁아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차량과 교행 하기가 어려웠다. 가림성 아래 도로 왼편으로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가림성 까..
성곽길 따라 걷는 낙산 한양 도성 하늘은 푸르렀으나 미세먼지로 시야가 탁했다.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이라서인지 온도는 15도를 웃돈다는 예보였다. 카메라 가방을 챙겨 동대문 역사 공원으로 갔다. 지난 인왕산길에 이어 경복궁의 좌청룡 능선인 낙산길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인왕산과 달리 낙산은 경복궁에서 보이지 않는다. 높은 건물이 없었던 조선시대엔 인왕 능선보다 낮기는 하지만, 오른쪽에서 우람하게 궁궐을 호위하는 능선이었을 것이다. 한편, 창덕궁이나 청경궁에서 보면 인왕능선보다 더 가까운 보호능선이 낙산성곽이었겠다. 지금은 낙산이 구릉처럼 형성되어 성 안팎으로 자잘한 주택들이 많았다. 그동안 정비되고 개발되었겠지만, 아직 70-80년대 모습을 지닌 곳이 많았다.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먼 길도 아니고 높은 고개도 없어서, 비고적 순탄하게 걸었..
성곽길 따라 걷는 인왕산 한양도성 날씨가 제법 풀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열었더니, 햇빛은 비치는데, 스모그 현상이 심했다. 대체로 오후가 되면 날씨가 맑아지는 경향이 있기에 천천히 준비해서 11시쯤 집에서 나왔다. 그러나, 스모그 현상이 더 심해져서 가시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졌다. 지난번 창의문에서 북악산을 오를 때, 뒤로 보이는 인왕산 성곽길이 아름다워서, d-day로 삼았다. 일기예보는 오후에 상온 10도 정도로 상당히 포근하리라 한다. 문제는 들머리를 찾는 것이었다. 창의문에서 오르는 코스는 햇살을 마주 보고 걷는 남향길이라 서대문길을 선택했는데, 들머리 코스가 다양해서 나는 나름 원칙대로 끊어진 도성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 오르기로 했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오산 독산성 세마대 작년까지 유적을 발굴한다고 파헤쳤던 독산성 북쪽벽이 복구되었단 말을 듣고 오랜만에 오산 세마대에 올랐다. 독산성에 대해 오산시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듯, 성윤곽이 예전보다 뚜렷해졌다. 아쉽게도 공사하고 난 뒤처리에 문제가 있었다. 치성의 전망대를 설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비닐 금줄을 함부로 둘러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별다른 유물이 나올 곳도 아닌데, 거창하게 파헤쳐진 흔적이 지워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서쪽 성벽과 서문으로 오르는 길 서문 햇빛을 등지고 순광을 따라 서문에서 북문 방향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말끔하게 단장한 북쪽 성벽, 목책까지 두르고, 성벽 아래 걷는 길도 새로 만들었다. 북쪽 암문 북쪽 끝 치성 전망대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본 북쪽 성벽 동문 안에 있는..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 최후의 보루 황산성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에... " 옛 시절 논산 훈련소에서 황산 각개전투 교장으로 훈련받으러 이동하면서 불렀던 군가들이 떠오른다. 그때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황산전투가 벌어진 황산벌은 어디일까'했던 궁금증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 탑정호 부근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의 묘를 보았을 때도 백제군이 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는 황산벌에 대한 궁금함은 풀리지 않았다. 백제군사박물관에 세워진 황산루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운 하나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찾아본 곳이 황산성이었다. 몇몇 블로거 분들이 황산성 탐방 사진들을 포스팅해서, 그들을 참고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연산향교를 입력하고, 향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핸드폰..
성곽길 따라 걷는 북악산 한양도성 수년 전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창의문에 올랐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옛 한양 성곽길을 따라 오르려 했으나 오후 3시가 넘어 입산을 통제하는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와대 개방으로 창의문 성곽길도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숙제 풀듯 등산길에 나섰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땐 푸른 하늘이었는데 창의문에 도착했을 땐 먹구름이 몰려들어 곧 비라도 뿌릴 정도로 음산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행여 산 위에서 비 맞을까 걱정하며 성곽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스산한 날씨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도 땀이 나지 않았다. 경사가 급해서 무릎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동안 서슬퍼런 청와대 경비에 억눌렸던 마음이 얽힌 실타래 풀리듯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창의문(자하문), 인조 반정 때..
오산 독산성 세마대 오랜만에 독산성에 올랐다. 그 사이 독산성 주변이 말끔해졌다. 동북쪽 성벽은 아직도 발굴작업이 끝나지 않아 성벽 따라 한 바퀴 도는 일주는 할 수 없었다. 내 소견으론 특별한 유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 공사를 이리 오래 끄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날씨는 맑았지만 연무가 끼어 멀리 바라보는 시계는 시원치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백제시대 창건했다는 보적사는 대대적으로 보수 중이었다. 대신 스님의 독경소리가 청량하게 가을날 햇살처럼 세마대 주변에 퍼지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독산성 서문으로 오르는 산길 독산성 서편 성벽 서문 서문 앞 남쪽 방향 서북성벽 끝 치성에서 바라보는 남쪽 방향, 성벽 안쪽으로 말뚝을 박고 줄을 연결해서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예전에 비해 깔끔해진 느낌이었다. 북쪽 성벽,..
대전 보문산성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보문산 아래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문산성을 향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구불구불한 길가에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음에도 많은 차들이 꾸역꾸역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도로가 복잡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어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먼저 보운대를 찾아갔다. 포장도로 큰 구비를 지나가자 축구장 만한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다. 차들도 별로 없었고... 미리 찬찬하게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 컸다. 네비를 과신한 것도 잘못이었고... 인근에 이정표가 없어 사람들에게 물어 길을 찾았다. 주차장 위에 목재문화체험장, 그 너머에 보운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벌써 코로나와 함께 살기로 한 모양이었다. 마스크를 쓴 사..
공주 공산성 청명한 날씨 덕에 석장리에서 가까운 공주 공산성으로 이동했다.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에서 북쪽 공산정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북동쪽 -> 동쪽-> 남쪽-> 서쪽 성벽으로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금강변 남쪽 산세를 따라 성을 쌓아서 높고 낮은 지형에 따라 성벽길의 높낮이 굴곡이 대단했다. 특히 금강변의 북쪽 성곽길은, 높낮이가 심해서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동북 쪽의 지형이 높아 북동쪽에 오른 뒤, 남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지난가을에 이곳 구석구석을 돌아본 탓으로 특별한 새로움은 없었다. 다만 날씨가 좋고 녹음이 어우러져 눈앞 풍경이 풍요로웠다. 공산성은 웅진 백제 시대 왕궁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수도 한성 위례가 함락된 백제는 475년에 이곳 웅진으..
용인 처인성 재작년 가을보다 주변이 깨끗하게 공원처럼 다듬어졌다. 예전엔 보수 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했었는데... 고려 후기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 때 스님이었던 김윤후 장군이 처인 부곡의 주민들과 함께 이곳에서 몽골군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면서 몽고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최대의 승전이었다. 본디 부곡 마을이란 천민들이 거주하던 부락이다. 국가로부터 멸시받고 양민들조차 따돌렸을 천민들이 승병들과 합세하여, 막강한 몽골군을 물리쳤다. 소외받던 그들의 처절한 투쟁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자고로 우리나라에 외적이 침략했을 때, 관군보다도 의병들이 봉기하여 외적을 물리친 사례가 많다. 고려 무인시대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만적의 난..
대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토요일 아침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산행을 머뭇거리다 큰맘 먹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계족산 자락 장동산림욕장에 이르자,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내비치었다. 대전시에서 이곳 산림욕장에 황톳길 순환도로를 만들어 시민들의 산행을 도왔다. 등산로 옆, 황톳길을 따라 맨발로 등산하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계족산성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맨발 황토체험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아기자기한 산림욕장에서 맑은 숲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숲 향기를 호흡하면서 산길을 걸었다. 계족산성은 보수 중이어서 서문터에서 남문까지 일부분만 일부분만 볼 수 있었다. 북쪽은 흰색 보드로 벽을 세워 막아 통행을 금지했고, 남문은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 중이었다. 유감스럽게 옛 산성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새로..
공주 공산성 한 바퀴 공산성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으나, 2015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처음이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는 475년 9월 고구려군이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살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을 빼앗기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된 백제는 웅진 공산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웅진은 근처에 금강이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어서, 당시 고구려에 쫓기던 백제가 수도로 삼기에 적합하였다. 이후 웅진은 동성왕에서 무령왕을 거쳐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옮기는 538년까지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피해 사비성(泗沘城)에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웅진 성주 예식진에게 7월 18일에 오히려 사로잡혀 포..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 남쪽에선 호우가 내린다는데, 여긴 날씨가 너무 맑고 고왔다. 가시거리도 멀어서 모처럼 독산성에 올랐다. 유물발굴 작업 때문에 서북쪽 성벽에 비닐을 덮고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막았다. 북쪽 암문부근에서 산 가운데 길로 우회하여 세마대에 올라 동남쪽 성벽을 걸어서 한 바퀴 돌아왔다. 공교롭게 산 위에 오르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마스크 쓰고 다니는 게 답답해서 한적한 곳에선 마스크를 벗어 들고 걸었다. 사람을 마주치면 마스크를 쓰고 지났는데, 마스크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보다 나를 위해 쓰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답답함을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모처럼 독산성 길을 걸으면서 북으로는 관악산, 동편으로..
화성시 당성 신라시대 중국으로 가는 통로였던 당성이었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숲 속에서 노숙하며 물을 마셨는데, 바가지로 사용한 것이 해골이어서, 원효대사는 무상감을 느껴 중국행을 포기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오랜만에 들렸더니 그동안 깔끔하게 단장되고 있었다. 성벽 주변에 무성했던 잡목들을 제거하고 성벽 위에는 잔디를 심고 사람들이 걷는 통로에는 마직포를 깔아 산뜻해졌다. 역사 유적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양새여서 보기에 좋았다. 7월 말까지 정비 보수공사가 끝나면, 자랑스러운 유적지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새로 들어선 당성방문자 센터, 새로 산뜻한 주차장도 마련하여 보기에 좋았다. 예전에 사용했던 당성 입구에 있는 관리 사무소, 이제는 철거하는 ..
용인 처인성 용인시는 1996년 시로 승격한 후, 2005년 3개 구로 분할하는 등,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용인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용구현과 처인현을 조선조 태종대왕 때 한 고을로 병합하면서 일컫게 되었다. 그중 처인구는 용인시청을 소재지로 하여, 여러 읍면들을 거느려 용인시에서 제일 넓은 곳이다. 한 때 용인시청사는 광화문 앞 정부종합청사보다도 그 규모가 커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또한, 넓은 면적을 지녔음에도 경부고속도로를 축으로 산림을 훼손하여 아파트와 공장들을 짓는 난개발로, 환경을 파괴한다는 오명을 한 몸에 뒤집어쓰면서 개선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역대 용인시장치고 난개발 건축과 관련하여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리의 온상지대이다. 처인성은 고려시대 1232년(고종 ..
항왜전적지 독산성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 7월 3일부터 아베의 수출제한 정책 때문에 금시라도 우리 경제가 폭망 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아베가 이런 술책을 2013년부터 고려했다고 하니, 시한폭탄이 이제야 터진 듯싶다. 그동안 뿌리 없이 성장해 온 우리나라 재벌들의 회사경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우리 상황을 보며, 그간의 외세침략사를 되새겨 보았다. 국난 극복노력에 힘쓴 것은 무명 백성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어찌 될는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극일방법은 일제 불매 운동이다. 내 가진 것 중 일제는 카메라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죄스럽다. 사드 때는 시진핑에게 당하고, 노동 임금 받지 못한 징용 갔던 사람들 못 받은 임금 갚으라는데, 쪼잔한 아베가 오히려 매를 들고 버릇을 가르치려 드니 적반하장도 ..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지화문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로 이름대로 말하면 임금을 지키는 장대란 뜻이다. 지휘소임에도 숲이 우거져 사방이 제대로 조망되지 않았다. 이층 누각으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수원 화성장대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나, 기능과 외적 아름다움을 견준다면 화성장대보다 멋스럽지 못하다. 아래층 마루는 북쪽에 판자로 벽을 세웠다. 그리고 수어장대를 둘러싸고 담장을 둘렀는데, 담장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후대에 쌓은 듯하다. 수어장대 측면에 세운 무망루, 조선 영조가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세운 것이다. 그 옆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하고 세운 사각 기념 표지석이 있다. 수어장대에서 나와 성벽을 따라 남한산성의 남문까지 걸었다. 성벽을 따라 걷는데 대부분의 길이 다듬어지지 ..
남한산성 행궁 간밤에 벼락과 우레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엔 햇살이 쨍하게 빛났다. 가시거리도 상당해서 멀리 광교산 머리가 깨끗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조반 후 얼른 카메라를 챙겨 남한산성으로 갔다. 모란역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할 때, 인터넷 검색과 달라 약간 착오가 있었지만, 버스 앱과 정류장 안내표지를 참고해서 모란역 3번 출구에서 9번 버스를 타고 목적지 종범까지 갔다. 시내버스 노선이 구불구불해서 지체되긴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만큼 마음만은 편했다. 산성 안은 산성축제 준비로 한창 바쁜 듯, 한가운데 주차장은 차량을 통제하면서 천막들을 설치해 놓았다. 서서히 가을빛이 물들어간다. 눈부신 가을 햇살 속에 바람이 조금 찼으나, 이내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표소에 들렸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행궁 기와보수공사를 ..
해미읍성 서해안 경험이 벌로 없는 친구들을 위해 찾았다. 우리나라 읍성 중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보존이 잘 된 곳이기도 하다. 유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잘 모르고 있어서 좋은 방문이 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친구에게 해미읍성이 순교성지라 뜻있는 방문이 되길를 바랬었다. 모처럼 날씨가 맑아 아기자기한 탐방이 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인근에 공군 비행장이 있어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들의 소음 때문에 귀가 먹먹해졌다. 내포평야가 펼쳐진 언덕에서 바라보는 쓸쓸한 겨울 풍경이었지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고통스럽게 처형당했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한 때를 보냈다. 읍성의 남문인 진남문 남문 안 풍경, 맞은 편이 관아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사람들을 매달아 처형했던 회화나무 읍성 안 감옥 나잇살 먹었어도 노는 짓은 어..
남한산성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다. 팔랑팔랑 낙엽 지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계절에,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서 쌀쌀한 바람마저 옷깃을 여미게 했다. 고운 단풍들이 사라지기 전에 느껴보자고 떠난 산행이 남한산성으로 바뀌었지만 그런대로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을산성을 찾았다. 공사 중이었던 동문을 다시 보며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양지바른 곳에선 이미 단풍들이 말라 오그라들었다. 산성 모퉁이 그늘진 곳에서나 아직 바래지 않은 단풍들로 위안을 삼으며 등반했는데, 산구비가 험하고 비탈길도 거칠어서 성벽을 끼고 오르는 산행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동문에서 북문 구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서인지 성벽 구조물들은 부서지고 떨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한성백제박물관과 몽촌 토성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 88 올림픽 경기장들이 들어선 이 지역이 백제 시대 몽촌토성이 있던 곳으로 백제의 첫 도읍지로 추정된단다. 주몽의 두 번째 아내였던 소서노가 고구려를 떠나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다고 전한다. 위례 백제에 관한 역사학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고서를 바탕으로 백제의 첫 도읍지는 지금의 천안 지방의 성거산 위례성(天安 聖居山 慰禮城)으로 충남 천안시 북면, 성거산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하남 위례'에 대한 이설들을 정설로 엮는 것은 학자들의 몫일 테고, 이곳 토성들의 유물들을 바탕으로 서울에 백제 박물관을 세웠다. 전시된 유물들은 보잘 것 없으나 이곳의 역사적 의의를 기릴 수 있..
오산 독산성 임진왜란 당시,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만을 기다리던 왜군, 당시 그들은 성안의 조선군들의 식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독산성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때, 권율장군이 산성의 꼭대기에서 말을 세워두고 보란 듯이 쌀을 퍼서 말등위에 퍼부었다. 성 아래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왜군들은 조선군이 물로 말을 씻는 것으로 착각해서 포위망을 풀고 퇴각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쌀로 말을 씻었다고 해서 그곳을 '세마대'라 부른다. 산성의 정식 명칭은 독산성이다.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무너지고 훼손되어 보수한 곳이 많다. 정조 때는 풍수쟁이들이 사도세자 능인 융릉의 기운을 해친다며 독산성을 허물자고 했으나, 대왕은 오히려 산성을 보수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이 본디..
화성시 당성 오월 하늘이 왜 이리 뿌옇기만 할까. 날씨가 잔뜩 흐렸다. 카메라를 들고 나서긴 했지만 흐린 날은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 사진을 찍어도 빛바랜 흑백사진 같아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화성시 송산을 지나 지난 기억을 더듬어 국도에서 좁은 산길을 찾아 당성입구까지 갔다. 당성 아래 있던 캠핑장마저 폐쇄되어 인적이 뚝 끊어진 절간 같았다. 무료해하던 당성관리사 영감님이 고개를 쑥 빼고 내다보았다. 안부를 물으니, 지난 몇 년 사이에 변화가 있었나 보다. 당성의 모습은 오히려 전보다 관리가 덜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워낙 방문하는 사람들이 드문 탓도 있겠지만, 화성시 당국의 무관심이 제일 큰 탓이라 하겠다. 옛날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신라인들이 목숨 걸고 싸워 당나라 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었던 곳...
남한산성 작년에 유네스코 기념 세계문화재로 등록된 남한산성.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이 깃든 산성이다. 1597년 왜란이 끝난 후 그 교훈을 새기지도 못한 채, 40년 후 만주족의 침략에 변변히 대응도 하지 못하고 이 남한산성에 숨어 항거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274년 후인 1910년에 왜적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뺏기고 식민지로 36년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국내 정치판도 왜란 당시나 호란, 한일합병 당대보다 좋을 것은 하나도 없을 성싶다. 정치판에서 그들만의 이전투구에서 민심은 안중에 없고 눈앞의 부정한 재물에만 탐욕스러우니, 정부의 꼬라지가 볼성사납기 그지없다. 윗물부터 맑아야 한다는 옛말도 그저 옛말로만 전하나 싶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마도 우리 한국인의 유전자에 정의는 없고 현실의 ..
여수 전라좌수영성 그동안 몇 차례인가 여수에 갔을 때는, 오동도나 향일암 같은 명승지를 찾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충무공 유적탐방을 테마로 삼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이순신 광장이었다. 이순신 광장을 돌아보고, 전라좌수영터에 있다는 진남관을 찾아갔는데, 지척에 있는 것도 모르고 큰길을 돌아서 비잉 돌아서 진남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진남관에 올라 담장에서 아래를 내다보니, 바로 아래가 이순신광장이었다. 현존 건물 중 규모가 제일 크다는 진남관을 둘러본 후, 계단옆에 있는 유물전시관에 들어갔다. 전시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눈길을 끈 것이 입구 왼쪽에 전시한 전라좌수영 모형이었다. 무심코 모형을 지나쳐 좁은 유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려 할 때, 좌수영모형 앞에서 유물관 직원이 관람객들을 에게 전라좌수영성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