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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여수 전라좌수영성

 그동안  몇 차례인가 여수에 갔을 때는, 오동도나 향일암 같은 명승지를 찾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충무공 유적탐방을 테마로 삼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이순신 광장이었다. 이순신 광장을 돌아보고, 전라좌수영터에 있다는 진남관을 찾아갔는데, 지척에 있는 것도 모르고 큰길을 돌아서 비잉 돌아서 진남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진남관에 올라 담장에서 아래를 내다보니, 바로 아래가 이순신광장이었다. 현존 건물 중 규모가 제일 크다는 진남관을 둘러본 후, 계단옆에 있는 유물전시관에 들어갔다. 전시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눈길을 끈 것이 입구 왼쪽에 전시한 전라좌수영 모형이었다. 무심코 모형을 지나쳐 좁은 유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려 할 때, 좌수영모형 앞에서 유물관 직원이 관람객들을 에게 전라좌수영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가 설명을 들었다. 그 동안 몰랐던 전라좌수영성의 역사와 해체과정을 들으면서 비로소 여수 전라좌수영성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진남관 바로 아래 전라좌수영성이 바다와 인접해 있었던 것을 간악한 일제가 항만건설을 핑계로 성을 허물고 성벽을 쌓은 돌로 바다를 메꾸어 전라좌수영성을 훼손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행히도 여수시에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예산문제로 현재까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전라좌수영성 입구의 망해루

 

 

 

전라좌수영 앞 안내문

 

 

전라좌수영은 조선시대 여수지역에 설치한 전라좌도 해안 경비를 담당했던 수영(水營)이다.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조 성종 10년(1479년) 정월에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을 신설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내례포(內禮浦)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내례만호는 며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며포와 내례만호진은 서로 다른 곳이었다. 

 

  며포는 대경도와 소경도가 위치한 국동(菊洞)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내례만호진은 여수시 군자동·동산동·관문동·고소동·중앙동의 남쪽에 인접한 해안, 즉 지금의 여수구항(麗水舊港)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1479년 3월 내례포(內禮浦)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었다. 1485년 3월 성보(城堡) 축조를 시작하여 1491년에 완성하였다.

 

 1498년 절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다. 1591년 2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여 1592년 1월 성문 해자를 만들고 3월 서문 밖 해자와 성곽을 쌓았으며 4월 품방 해자를 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왜군과의 해전에서 여러 번이나 크게 승리한 1593년 7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제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였다.

 

 1598년 절도사 이시언이 충청병마절도사에서 본직으로 옮겨 삼도를 통제할 제영사를 건설하였다. 1599년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진해루지에 객사 진남관을 건립하였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하고 화약고, 수군기(水軍器), 호고(戶庫), 해현창(解懸倉)을 새로 지었다. 1673년 절도사 원상이 보군창을 새로 짓고 1684년 절도사 한근이 완경루를 창건하였다. 1694년 절도사 정동망이 지창(紙倉)을 창건하였다.

 

 1716년에 진남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진남관을 중건하였다. 1722년 박세정이 도무창을 창건하고 1729년 절도사 우하영이 주사창을 창건하였다. 1741년에는 전반집물고, 병반집물고, 외창을 창건하였다. 1759년 절도사 이윤덕이 완경루를 재건하고 1767년 절도사 김종만이 보군창을 증창하였다. 1770년 절도사 김상옥이 각 창고의 병기고와 광양둔창, 보선고를 중수하였다. 1773년 절도사 김영수가 체성(體城)을 보축하고 여첩을 개척하였으며 곡성(曲城) 6곳에 포루를 세우고 화기포 6좌를 설치하였다. 1774년에는 동문루를 철문으로 건립하고 장대를 겸하는 동문좌포루, 서문우포루, 수성중군청, 의승청, 수첩군관청, 수성고를 창건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을 철폐하였다. <네이버 백과 발췌>

 

통제영으로 들어가는 문

 

  진남관- 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지휘소였던 진해루 위에 세웠다. 본디 개방된 건물이 아니라 좌우측은 칸막이가 되어 객사로 쓰였다. 일제가 학교 건물로 쓰기 위해 허물지 않은 까닭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통제문 앞에서 바라 본 여수 항만과 돌산도로 건너가는 다리

 

 전라좌수영성 계단 옆, 유물 전시관에 있는 전라좌수영성 모형

 

전라좌수영성 복원도 CG <출처  http://panzercho.egloos.com/10052860

 

전라좌수영성은 평지 석성으로 축성 당시 규모가 둘레 3,634척, 동서 길이 1,200척, 남북 길이 908척인 동서로 약간 긴 모습이었다. 몇 차례 불타버리기도 했으나, 1774년 절도사 김영수가 성을 보수한 뒤의 기록에는 6곳의 곡성(曲城), 즉 치(雉)가 6개 있었으며, 여기에 포루(鋪樓) 6채를 세우고 화포기(火砲器) 6좌(坐)를 두었다.

  1847년 허섬(許暹)이 쓴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체성(體城) 주위가 3,158포척(布尺)이라 하였다. 성 안의 샘과 우물도 각각 6곳과 7곳으로 대체적인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한다.

  완성 당시 규모를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3.44m가 되는데, 이것은 현재 성곽의 유지(遺址)로 실측되는 1.74㎞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에 설치되는 치성(雉城)이나 옹성(甕城) 부분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1491년에 성체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고, 이후 이 바탕 위에서 적절한 변용이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쪽·동쪽·서쪽에 성문이 있으며, 남문 밖은 바로 바다와 면하여 성체의 형상은 원형에 가깝다. 영성(營城)은 다른 읍성의 경우와 다를 바 없는 배치로 『호좌수영지』의 영성도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 진남관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남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가로는 객사와 동헌에서 노단경(路端景)이 된다. 즉, 가로망은 남문에서 동헌과 객사로 이어지는 남북축과 서문에서 동문까지의 동서축이 삼교차(三交叉)되는 곳에 객사와 동헌이 위치하며, 동쪽에 중영(重營), 서쪽에 향청(鄕廳)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복개되어 도심 간선도로가 된 굴강(屈江)을 따라 남문에서 망해루(望海樓)와 진남관으로 이르는 남북축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서문에서 군자동과 중앙동의 경계인 골목길은 망해루에 이르고, 다시 여기서 진남관 동쪽 담장을 따라서 동헌에 이르러 동산동과 관문동의 경계인 골목길을 따라서 동문에 이른다. 도중에 중영(中營)과 장대(將臺)인 고소대(姑蘇臺), 기타 건물들로 연결된다. 이러한 가로망이 당시의 삼교차로(三交叉路)를 이루던 영성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지금은 골목길로 변하여 남아 있다.<여수시 홈페이지 발췌>

 

  훼손이전의 전라좌수영성, 진남관을 둘러싼 성벽이 있고, 그 밖이 바로 바다였다. - 유물관 사진 촬영

 

 전시된 유물 충무공의 임진일기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임진왜란 발발 1년전 전라좌수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성곽을 보수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왜구침략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전라좌수영을 본진으로 하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泗川)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唐浦)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해 50여 척의 왜선을 격파ㆍ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지원하러 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釜山浦)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 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진 내륙의 적들과 왜적들의 서해 진출을 막고자,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전진기지로 삼았다.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은 전략상 출정하지 않은 이순신을 파직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의 왕명을 받았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折爾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 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네이버 백과 발췌>

 

  전라좌수영성 아래 매립된 항만에 조성된 이순신 광장

 

 

 

  거북선 내부

 

 

광장에 세워진 전시조형물 일부

 

  여수항만과 돌산대교

 

  돌산대교

 

  돌산도를 잇는 곤돌라

 

  이순신 광장 로터리에 세운 충무공 동상, 동상 뒤로 보이는 망해루와 진남관, 옛날엔 망해루 아래가 바로 바다였다.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 장군의 전투지휘본부였다. 이곳에서 출정하여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하여 패전의 늪에 빠진 조선을 구하였다. 그후, 영남과 호남의 일부 지역을 적군이 점령하자, 적군의 길목인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 전라좌수영은그 당시 조선 수군의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수군들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하자 1593년 전라 경상 충청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대부분 통영시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통제영이 그곳에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후인 1604년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그곳 두룡포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옮기면서부터이다. 왜란당시 통영은 왜적의 점령지여서, 충무공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을 견제하고 그들의 서해진출의 길목을 막기 위해 전라좌수영 전진기지로 한산도에 본영을 옮겼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항만공사라는 미명아래 전라좌수영성을 해체하고, 그 돌로 전라좌수영성 앞 해안을 매립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유서깊은 전라좌수영성은 일제에 의해 사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읍성과 산성이 있으며, 지방자치단체마다 자기 고장의 성들을 복원하여 문화유적을 발굴하여 자기 고장의 명예를 높이고 있다. 순천 낙안읍성은 이미 유명한 민속 관광지가 되었고, 서산 해미읍성은 천주교 성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패자의 성(城)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이 서린 남한산성도 온전하게 복구하여 지난 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본영이자 조선 수군들의 병참기지로서 왜적을 물리쳤던 전라좌수영성은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채, 도시의 그늘에서 치욕스런 흔적만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공훈을 기리고, 장군과 함께 목숨 바쳐 전라좌수영 수군들과 그들의 후원자였던 이곳 백성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현실 속에 전라좌수영성은 존재해야 할 것이다.이순신 장군은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여, 전란 중 전라좌수영성의 중요성과 목숨 바쳐 싸운 전라 수군, 전투보급품을 지원한 전라도 백성들의 고군분투가 위기의 조선을 구했음을 강조하신 바 있다. 어려운 당대 현실을 극복하고 임란에서 승리한 것이 어찌 호남만의 힘으로 되었을까마는 전라좌수영성이야말로 왜란을 승리로 이끈 삼도수군 통제영의 본영이자 구국의 城이었다. 자랑스러운 전라좌수영성을 복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충무공의 공훈을 기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Photo by Sony a6000, ILCE-6000L/B. E PZ 16-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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