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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화성시 당성

 오월 하늘이 왜 이리 뿌옇기만 할까. 날씨가 잔뜩 흐렸다. 카메라를 들고 나서긴 했지만 흐린 날은 그야말로 대책이 없다. 사진을 찍어도 빛바랜 흑백사진 같아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화성시 송산을 지나 지난 기억을 더듬어 국도에서 좁은 산길을 찾아 당성입구까지 갔다. 당성 아래 있던 캠핑장마저 폐쇄되어 인적이 뚝 끊어진 절간 같았다. 무료해하던 당성관리사 영감님이 고개를 쑥 빼고 내다보았다. 안부를 물으니, 지난 몇 년 사이에 변화가 있었나 보다. 당성의 모습은 오히려 전보다 관리가 덜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워낙 방문하는 사람들이 드문 탓도 있겠지만, 화성시 당국의 무관심이 제일 큰 탓이라 하겠다.  

 

 

  옛날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신라인들이 목숨 걸고 싸워 당나라 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었던 곳. 의상과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위해 신라에서의 마지막밤을 보냈던 곳이 바로 당성, 또는 당항성이다. 원효스님은 산중 노숙에서 떠마신 물바가지가 해골이어서, 깨달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되돌아와 민중 중심의 불교를 전파했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의 산실이 이곳으로 짐작한다.  한편, 원효와 달리 당나라에 유학한 의상 스님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신라로 돌아와 우리나라 곳곳에 사찰을 지으며 귀족 중심의 불교를 포교하였다.

 

 

당성 입구에 있는 당성 사적비

 

당성의 동문, 새로 쌓은 성벽의 돌색깔이 많이도 어설프게 보였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은행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성안의 길들은 사람들의 통행이 적어 잡초만 무성했다. 웃자란 풀들로 뱀이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당성 서문의 흔적, 성벽이 끊어져 있고 흙더미 위로 잡초만 무성한데, 야생화들이 만개하였다.

 

북문으로 오르는 성벽, 전에 무너져 있었는데, 그 사이 보수했나 보다. 새로 쌓은 화강암 빛깔이 너무 튀게 보였다.

 

 

 당성의 북단에서 바라보이는 서해바다와 섬들... 예전엔 바닷물이 바로 이 성 아래까지 들어왔을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 대원군이 청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던 마산포가 있으며,  청일전쟁의 전초전이었던 풍도해역이 대부도에서 그리 멀지 않다.

 

  멀리 보이는 섬이 대부도

 

 당성 북단의 언덕 위에 있는 망루의 흔적

 

성의 북쪽벽은 토성으로 옛 모습 그대로이다. 조금 높은 토성둔덕 아래로 경사가 가팔라서 천연지형지물을 이용한 토성만으로도 방어가 충분해 보였다.

 

 

동문의 흔적

 

북쪽에서 동남으로 내려가는 성벽은 돌로 새로 쌓아 복구했다. 

 

 

 당성 이웃에 있는 신흥사, 불교 교육원으로 규모가 제법 크다.

 

 

 풍도해전과 청일전쟁 -  1894년 6월 7일, 청나라는 2000여 명의 군사를 아산과 성환, 평택지역으로 상륙시켰다. 조선 조정이 그 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은 1885년 청일 간에 체결된 톈진조약에 따라 7600여 명의 병력을 인천항을 통해 한성으로 진출시켰다. 조선 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군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자국에서 발생한 작은 농민운동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 조정의 요구는 일본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7월 25일 아침. 풍도 서북해상을 지나던 청국 군함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3척의 일본 군함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1200여 명이 풍도 앞바다에 수장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해전에 이어 1894년 7월 28일 저녁, 일본군과 청군은 충남 아산 성환역 인근에서 5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를 했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500여 명이 전사한 반면 일본은 단 68명이 전사하였다. 1894년 9월 15일에는 일본군 1만 7000여 명의 병력과 청군 1만 2000여 명이 평양에서 다시 한번 혈전을 벌였다. 일본은 평양까지의 긴 거리 간 식량과 보급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성환전투’ ‘평양전투’ 등에서 청나라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이듬해 2월 청나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은 청과 일본이 벌였으나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일 간의 협상의 주요 안건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와의 종속관계에서는 벗어난 대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물로 전락되어 간 것이었다.

 

  많은 안보 전문가들은 최근의 동북아 안보환경이 120년 전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추진 등 우경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지역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하는 등 중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과거사 문제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 등으로 동북아 안보상황은 갈수록 복잡하고 위중해지고 있다. 이처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안보정세는 우리에게 120년 전의 청일전쟁 중에 백성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조선의 전철을 결코 밟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조국의 산하를 열강의 전쟁터로 내주었던 뼈아픈 역사를 깊이 자각하고 우리의 국방안보태세를 확고히 하는 데 온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40721&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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