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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치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남한산성

  권력욕에 눈 먼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로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축출하고 능양군이던 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명분을 주장하며 오직 대명(大明)만을 사대하는 정책으로 몰아갔기에 두 번의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왕은 왕대로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으며,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거나 삭풍이 부는 오랑캐 나라로 끌려갔다. 

  반정 후 논공행상을 빌미로 북방을 지키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훈련된 군사들을 잃은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괄의 쿠데타로 공주까지 도망간 인조로서 국방을 강화하기보다는 장수들을 견제하는데 힘써,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난리가 나면 임금이 도망하는 것이 우리나라 지도자의 유전자인지 임란 때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임금처럼 그 손자인 인조 또한 이괄의 쿠데타 때 공주로 도망갔으며, 정묘호란 때는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란했고, 병자호란 중엔 강화도로 도망가려다, 강화도 함락 소식에 부득이 한양의 남쪽 남한산성에 황급히 숨어들었다. 추운 겨울 혹한기에 좁은 산성 안에 고립되어 50여 일간 악전고투하다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굴욕적 항복을 하고 말았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은 수도 서울 사수라는 녹음방송으로 시민을 기만하고 제일 먼저 한강을 넘어 대전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한강다리를 끊어버려 서울시민들을 고립시켜 인공치하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 수복 후에는 부역자라고 처단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조선조 최악의 임금이었다는 인조는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마저 죽이고, 평생을 의심하며 전전긍긍 왕권을 위해 살았다. 그를 떠받드는 서인의 무리들은 두 번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여 선조의 자식들이 조선의 왕위를 계승했듯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여 조선조 멸망 이후 오늘날까지 이 땅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다. 

 타국과의 외교관계는 탄력있는 유연함이 전쟁을 피하고 국가의 실리를 얻는 지름길이다. 강하면 부딪히고 부딪히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유사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역사의 교훈이다. 중국, 북한, 러시아가 한뜻으로 힘을 모으고, 미국과 일본 우리나라가 연합하여 힘을 겨루는 오늘의 정세 또한 위태롭기 그지없다.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한 때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악전고투했던 남한산성에서 패자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7세기 신라시대 유적부터 17~19세기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이 모두 보이며, 비상시 산성도시라는 독특한 점이 큰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산세와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린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 그리고 서양식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기술이 접해지고, 당시 중국과 일본의 축성양식까지 더해진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단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남한산성의 안전등급이 D E급으로 안전대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는데, 현재 곳곳의 성벽이 허물어져 방치되거나 부분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며 북문은 가림막을 쓰고 해체 후 복원 중이었다. 일제 초기까지 광주군의 행정수부였던 남한산성은 벌써부터 대부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요식업 중심의 마을이 되었다. 지난 역사의 살아있는 교육장보다는 행락객들의 유원지가 된 것 같아 산성 안을 걷는 동안 내내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산성으로 출입하는 보행 진입로

 

산성 안, 중심지인 로터리 부근, 세계문화유산 유적지 표지석

 

남한산성 행궁 안내도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행궁은 1624년(인조 2년)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명으로 착공하여 2년 후인 1626년(인조 4년)에 완공하였다. 이후 온전히 보전하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행궁과 관아에 방화하여 불에 타 소실되어서 행궁지로 남아있다가 문화재청에서 2011년 행궁구역의 대부분을 복원했다.

 

외삼문과 행각

 

한남루에서 내려다본 아래 풍경 

 

한남루 2층 누각 안

 

외행전, 왕이 정무를 보는 공간이다. 병자호란 당시 임금이 병사들에게 이곳에서 음식을 베풀었으며, 좌승당 건립 이전에는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였다.

 

외행전과 일장각 사이의 출입문

 

일장각, 행궁 내행전 북쪽 담장 밖에 있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순조 때 지었다.

 

외행전 위 삼문 안에 있는 내행전, 상궐로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인조 2년에 처음 지었다.

 

우측의 온돌방

 

가운데 대청마루

 

좌측의 온돌방

 

좌승당,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 밖에 있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순조 때 건립하였다.

 

내행전 밖 좌승당에서 이위정과 재덕당으로 오르는 명위문

 

내행전 위에 있는 재덕당

 

이위정, 좌승당 위 후원에 있는 정자로 활을 쏘는 곳이다.

 

행궁 담장 밖 건너에 있는 좌전과 정전, 사당과 제단 

 

이위정 뒤에서 내려다본 행궁 전경

 

후원 아래 상궐 남행각과 내행전

 

외삼문 아래, 한남루의 뒷면

 

한남루 밖, 측면에서 바라보는 행궁

 

행궁에서 인화관으로 가는 숲사잇길에 세워 놓은 각종 석물들 

 

행궁의 좌측면 아래에 있는 객사인 인화관

 

인화관 밖의 남한산성 한옥 마을 상가

 

 

병자호란 때 성안에서 농성전 중이던 병사들을 북문밖으로 전략도 없이 강제로 떠밀어 조선군 300여 명이 속절없이 전사하였다. 이를 극복하고자 후대에 북문을 전승문이라 했으나,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서 병자호란 후 300년이 못되어 조선은 일제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합되고 말았다. 전승문을 보기 위해 북문으로 갔으나, 가림막을 치고 복원공사를 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땜질이 한창인 것을 보면, 예전 공사 수준을 알 수 있겠다. 성곽도 무너진 곳이 많아 도처에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에 성벽 너머로 하남시가 보였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오르는 성곽길

 

연주봉 옹성의 통로인 암문

 

암문 밖 연주봉 옹성

 

서문 부근에서 성벽너머로 바라보는 한양 도성, 멀리 서울 타워와 삼각산이 조망되었다.  

 

좌익문으로 불리는 산성의 서문

 

수어장대로 가면서 간간이 성곽길에서 볼 수 있는 서울시가

 

남한산성의 군사지휘소인 수어장대

 

장대 왼편에 있는 무망루

 

수어장대에서 바라보는 남쪽 풍경, 멀리 수원 광교산이 보였다.

 

어쩌다 찾아 오르는 남한산성,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상쾌하지 않다. 오늘도 여전히 체증이라도 걸린 듯 마음 한 켠이 답답한 채로 산성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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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지화문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로 이름대로 말하면 임금을 지키는 장대란 뜻이다. 지휘소임에도 숲이 우거져 사방이 제대로 조망되지 않았다. 이층 누각으로 화려하고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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