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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부여 부소산성의 가을

  부여만큼 슬픈 도시가 있을까?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성에서 웅진으로, 63년간의 도읍지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력이 쇠할 때마다 쫓겨 다녔다. 종내 122년을 버티던 사비성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망한 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해도 헛된 말은 아니다.

  부여는 여러 번 가본 곳이라 그곳의 지리가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계룡시와 논산을 경유하여 갔다. 이른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부여로 갔으니 신라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서진했던 방향과 같은 셈이었다. 

  논산벌은 들이 넓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옛날에는 그야말로 탐나는 노른자위 땅이었던 셈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건국한 지 677년 만에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후에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왕조가 망한 것은 의자왕이 항복한 660년 이때였다.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한 지 한 달여 만인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을 만나, 당고종으로부터 모두 사면받았다. 당나라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 그곳까지 끌려가서 사면까지 받아야 했는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서 진 댓가치고 너무 혹독한 것이었다. 그 뒤 의자왕은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 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60년의 삶을 마감하고, 이역만리 타국 땅 이름 모를 장안 변두리에 묻혀 오늘날 그의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부소산에 오르기 전에 먼저 옛 박물관 건물과 부여 객사 등을 둘러보고 부소산문으로 들어가 산길을 돌아 고란사까지 걸었다. 은행잎은 거의 다 떨어지고 단풍들이 마지막 열정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금년 단풍은 예년에 비해 색이 곱지 않았다. 물드는 시기가 나무마다 제 각각이다. 기온이 뚝 떨어져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걷는 데는 오히려 더 좋았다. 부소산 구비길을 돌고돌아 사자루 낙화암을 넘어 고란사로 내려갔다. 고란사 아래 나루터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다가 산을 되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 난간에 기대어 낙화암을 바라보고 있던 차에 유람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꿈꾸는 백마강' 노랫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섞여 구슬프게 들렸다. 구드레 선착장에 내려서 주차장까지 걸어 가는 동안 내내 유람선에서 들은 '꿈꾸는 백마강'노랫말이 귓가에 남아 울리고 있었다.

 

옛날 부여 박물관(1970~1993)이었던 사비도성 가상 체험관-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1967년 준공했으나 건물의 외관이 고대 일본신사를 닮아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부여 객사인 부풍관 

 

부여 동헌

 

도강영당 외삼문

 

내동헌, 본디 관아 건물이었으나 현재 도강영당 강당으로 쓰인다.

 

내삼문과 도강영당, 홍가신 (1541∼1615) , 허목 (1595∼1682) , 체재공(1720∼1799)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부소산문으로 가는 길

 

부소산문, 부소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 좌측에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간다.

 

부소산문 뒷면

 

삼충사 정문인 의열문, 삼충사는 백제 말 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내삼문

 

삼충사, 좌로 부터  성충,  흥수, 계백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충신 성충

 

충신 흥수

 

장군 계백

 

산성 동쪽의 영일루로 가는 길

 

영일루,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유적 발굴 공사 장비들이 주변에 쌓여 있어서 누각의 아름다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영일루 옆에 유적 발굴 공사가 한창이었다.

 

보소산성 성벽길, 부소산성은 테메식 산성으로 토성이었는데, 이제는 세월의 흔적만 보이는가 싶다.

 

반월루 가는 길, 

 

반월루 앞 부여읍내와 백마강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사자루, 낙화암 가는 길

 

부소산 정상의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 곧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다.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아마 백제 시대에는 망루가 있어서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 지었고, 1990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땅을 고르다가 금동불(일명 정지원명 금동불)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서쪽의 편액은 백마장강(白馬長江)인데, 북쪽에서는 햇빛이 나무 강해서 남서 쪽에서 올려다보며 촬영했다.

 

백화정, 낙화암 위에 세운 정자.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 시에서 따온 것이다.

 

낙화암 아래로 가파른 계단길 끝에 있는 고란사.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지만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전하여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고란사 지붕은 내가 볼 때마다 비닐을 이고 있었다. 2년 전에 볼 땐 괜찮아 보였는데, 지붕공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하다. 

 

고란사 아래 백마강변 나루터 풍경

 

수륙양용버스...

 

백바강변에서 구드레로 가는 나룻배를 탔다. 5000원이던 것이 그 사이 6000원으로 올랐다. 이동 중 바라본 백화정과 낙화암, 역광이라 아쉬운 풍경이었다.

 

낙화암과 고란사

 

낙화암,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궁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岩)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구드레 나루

 

사비성이 함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60년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했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7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7월 9일로부터 고작 10일 만이었다. 그런데, 《구당서》의 기록에는 당시 '대장 예식(禰植)'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나와 있다.

오늘날 사학계에는 웅진 방령이었던 예식이라는 인물이 의자왕과 태자를 사로잡아 놓고 당군에 항복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더욱이 최근에 예식과 동일 인물로 추측되는 예식진의 묘지명이 발굴되었는데, 그 내용을 통해 예식이 왕을 붙잡아 항복했다는 주장이 더욱 탄력을 받았다. 이후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었는데 그중에 손자 예인수의 묘지명에서 조부(예식진)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쳤음을 대놓고 적어서 그가 의자왕을 배신했음이 명확해졌다(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의자왕은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결사항전하여 반전을 만들어 내고자 했으나 예식진이 배반하여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당시 웅진성의 수비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의자왕이 자살하려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아서 죽지 못하고 소정방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웅진성 수비대장 또한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자체가 논란이 많기 때문에 그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가, 예식진의 묘비명과 그의 가족묘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어 8월 2일에 나당 연합군은 전승을 기념하는 대연회를 열었다. 이때 신라의 무열왕과 소정방 등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부여융 등은 당하에 앉았다. 이윽고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이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던 백제의 군신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660년 9월 3일 의자왕은 왕후인 은고부인과 아들인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이하 신하 및 장수 93명과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수도인 장안에 이르렀다. 660년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 등 37명 등과 함께 조당에 나아가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났다. 당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하였다. 그 뒤 그는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 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사실 아들 부여융이나 고구려의 동병상련 보장왕이 나라가 망한 뒤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의자왕이 오래 살았다면 당나라가 부리는 괴뢰정권의 얼굴마담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일찍 죽어버려서 더한 모욕을 피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죽은 의자왕과 그의 후손들은 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묻혔다. 당고종은 의자왕이 죽자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추증하고 의자왕의 옛 신하들로 하여금 조상하게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와 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와 함께 묻혔는데 이 묘역에는 망국의 군주들만 모아서 매장했다.

이후 부여융이나 부여풍을 비롯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의자왕의 후손들은 모두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부여융은 웅진도독부 도독이 되어 사실상 당나라의 꼭두각시로 동생 부여풍이 이끄는 부흥군을 토벌하는 등 형제끼리 싸우는 씁쓸한 결과를 맞는다. 일본 승려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셋째 왕자가 흑산도로 피난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삼국사기》보다 좀 더 당대에 가까운 전승인만큼 실제 백제판 마의태자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백제 멸망 후 약 200년이 지난 뒤 기록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에서 떠돌던 옛 전설일 수도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 왕릉원(능산리 고분군)에는 선조들의 무덤과 함께 의자왕과 그의 태자 부여융의 가묘도 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서쪽 능산리 절터 쪽으로 가다 보면 도중에 있는데 다른 정식 왕릉보다 봉분 크기는 작고 비석에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원래 여기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 새로 만든 무덤인데 부여군에서는 중국 뤄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북망산에 묻힌 의자왕의 무덤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북망산 일대는 의자왕릉뿐 아니라 지역 전체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도굴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딱히 의자왕릉이라서 타깃이 되었다기보다는 중국은 동릉 도굴 사건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당장 관리 인력이 상주하던 청나라 황릉도 군벌이 폭탄을 동원해 도굴할 정도로 근대에 혼란이 극심했다. 땅을 더 파면 찾을지도 몰랐지만 시간, 인력,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2000년 4월 영토 반혼제 의식을 올리고 그곳의 흙을 퍼와 일단 부여군 부소산성에 있는 고란사에 봉안했다가 2000년 9월 이곳에 가묘를 세웠다. 의자왕이 백제를 떠난 지 1340년 만에 선대 왕들과 나란히 같은 장소에 묻힌 것이다. 7세기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양식으로 묘를 조성하고 무령왕릉 지석을 참고해 백제의 장례 방식으로 묘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의미로 매지권과 의자왕의 품성과 일대기를 기록한 자체적으로 만든 지석을 관과 함께 매설하였다.

2008년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2017년 중국 북망산에서 의자왕의 능묘로 추정되는 능묘 1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다만 과거 의자왕의 유해 귀국을 추진하다가 막대한 비용을 치른 일이 있어서 유해 귀국은 추진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위키 백과>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