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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성곽길 따라 걷는 북악산 한양도성

  수년 전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창의문에 올랐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옛 한양 성곽길을 따라 오르려 했으나 오후 3시가 넘어 입산을 통제하는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와대 개방으로 창의문 성곽길도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숙제 풀듯 등산길에 나섰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땐 푸른 하늘이었는데 창의문에 도착했을 땐 먹구름이 몰려들어 곧  비라도 뿌릴 정도로  음산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행여 산 위에서 비 맞을까 걱정하며 성곽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스산한 날씨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도 땀이 나지 않았다. 경사가 급해서 무릎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동안 서슬퍼런 청와대 경비에 억눌렸던 마음이 얽힌 실타래 풀리듯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창의문(자하문), 인조 반정 때 반란군이 이 문을 통해 입성하여 명목 없는 반정을 일으켰다. 그때 선봉장이었던 이괄은 그의 공에 비해 훈공이 낮게 책록 되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한성부윤이 되었다. 후금 세력이 점점 커져 평안도 지방에서 분쟁이 잦아지자, 이괄은 이를 수습할 장수로 발탁되어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평안도 영변으로 옮겨 갔다. 한양을 떠나는 불만이 있었지만 그는 북방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반정에 참가한 그의 아들들이 공신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조정 간신들은 이괄 부자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자 했다. 분노한 이괄은 조사관으로 그의 주둔지 영변에 온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의 목을 베고 군사 1만 2000여 명 및 항왜병(降倭兵, 임진왜란 시기에 항복한 일본 군사) 100여 명을 주축으로 1624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삽시간에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고 잘 훈련된 군사들을 몰아 개성 북쪽 예성강 상류 저탄에서 관군을 무찌르고는 승승장구하며 개성을 거쳐 벽제로 진격했다. 인조는 형세가 급박해지자 임진왜란 때의 선조의 몽진처럼 황급히 도성을 비우고 공주로 피란했다. 이괄은 난을 일으킨 지 20여 일도 안 되어 한양도성 궁궐에 무혈입성하여, 입성 이튿날 선조의 열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저탄 전투에서 패배한 관군이 잔여 병력을 수습해 안령(鞍嶺, 서대문 질마재)에 진을 치자, 이괄은 관군을 무찌르기 위해 즉시 야음을 이용하여 진격했으나, 궂은비가 내리는 탓에 오히려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이괄이 궁궐로 후퇴하여 진압하려는 관군과 싸우는 틈에 창경궁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관군에게 패한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지만 부하 장수 이수백과 기익헌이 배신하여 잠자는 이괄의 목을 잘라 관군에 투항했다.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제압하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그의 잔여 세력들은 후금으로 도망쳐 후금의 태종을 충동질하고 조선 침략의 길잡이가 되어, 1627년 정묘년 1월에 후금 태종은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괄의 난으로 여진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사라진 조선은 대항도 변변히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조선왕조는 불과 28년 전 임진왜란의 교훈도 잊고 비참하게도 정묘년과 병자년에 두 번의 호란을 맞아 후금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왕조의 쇠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창의문 내성, 성루 누각 안에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고 한다. 

 

  창의문 외성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통해 산행길에 올랐다.

 

  창의문 옆 등산 안내소

 

  성곽 곳곳에 성벽을 외벽으로 참호를 만들어 요새화했다.

 

  가파른 성곽 계단을 오르다 보니 북악산 정상이 보였다.

 

  뒤쪽 인왕산으로 이어진 한양 성곽

 

  성 밖 서쪽으로 북한산 능선이 길게 뻗어 있었다, 뾰족한 바위산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오르는 도중 숨이 가쁠 때마다 성 밖 서쪽의 북한산 능선을 바라 보았다. 긴 능선이 북쪽으로부터 한양도성을 감싸고 있다.

 

 가파른 계단길

 

  가파른 계단 중간 지점에 쉼터가 있었다. 잠시 쉼터 안에서 쉬었다.

 

  드디어 정상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왔다. 정상이 20m라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백악마루에 올랐다.

 

  백악마루, 정상 표지석이 있고 공터 오른쪽 끝부분에 어중간한 바위가 앉아 있었다. 저 바위 위가 정상인 셈이다.

 

  1979년 10월 15일부터 2000년 9월 9일까지 청와대를 지키던 발칸 포대 진지였다는 안내문. 김대중 정부 때 복원했다는...  북악산 전체가 청와대를 지키는 거대한 요새였다. 그랬던 청와대가 텅 비어있다. 불현듯 격세지감이 들었다.  

 

  정상 위에 앉은 바위, 북악산 제 1봉이다.

 

  정상인 북악산 제 1봉에 올라 기념해 보았다. 아래 있던 젊은이들과 핸드폰으로 서로 품앗이했다.

 

  바위 아래 백악 마루, 생긴 모양이 영락없이 대공포 진지다웠다. 내가 군복무하던 시절, 우리 부대 대공초소에 거치했던 M50 기관총 좌대보다 공간이 조금 넓어 보였다. 양쪽 어깨에 거치하고 우람한 총렬 두 개로 적 비행기를 쏘는 M50은 2차대전 때 쓰던 미군의 유물이었는데, 보기엔 폼나 보였었다. 데드라인 상태여서 실사격 훈련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땐 그런 장비들이 많았었다. 철모, 수통, 대검, 반합, 트럭 등이 미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장비로 월남전, 멀리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것들도 제법 있었다.  

 

  바위 위에서 보는 북한산 능선

 

  백악마루에서 내려오면서, 가까운 아랫녘에 광장이 보였다. 이른바 청운대, 돌출된 성벽이 휘어지는 곡성과 팔각정이 멀리 보였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가는 도중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로 침입하려던 무장공비 31명과 아군이 교전할 때, 소나무에 맞은 총알 표식이 보였다. 121 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였으며, 현역병들은 육군과 해병대가 6개월(36개월), 해군과 공군이 3개월(39개월)씩 복무 기간을 연장했다. 제대를 앞둔 말년 사병들 역시 6개월을 더 복무하고 전역했다. 또한, 1969년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과정에 교련과목을 편성하여 집총 훈련을 받았으며, 대통령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유신헌법이 1972년 선포된 이후 1975년부터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까지 이 땅의 민주주의는 뿌리까지 뽑혀 철저히 압살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소나무 총 맞은 자리에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로 흔적을 그려 놓았다. 

 

  성벽 안내문, 성벽을 쌓은 사람을 알 수 있도록 돌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이야기

 

  청운대에 이르니 북악산 뒤편이 보인다. 청운대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남산, 관악산, 그리고 정면으로 수원 광교산이 멀리 보였다.

 

  청운대 표지석

 

  동북쪽 방향

 

  서북쪽 방향

 

  청운대 성벽 위에 설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서쪽 북한산 능선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청운대 쉼터

 

  안내판 사진 방향으로 한 장 찍었다. 오른쪽 나무가 시야를 조금 가렸기 때문에 잠시 망설였었다.

 

  청운대에서 내려가다가 갈림길에서 위치 안내도를 보며 성곽을 따라 곡성 방향으로 직진했다.

 

 곡성 위에 올랐다. 곡성은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이다. 사방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곡성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남쪽 방향, 북악산 왼쪽으로 남산, 관악산, 광교산이 보였다.

 

  북악산 오른쪽 인왕산 방향

 

  곡성 밖으로 내려갔다. 쭈욱 뻗은 치성에서 서쪽과 북쪽 성의 외벽의 적들을 바라보며 쉽게 공격할 수 있겠다. 

 

  성 안으로 다시 들어와 성 위의 지붕에서 바라보는 남쪽 풍경.

 

  팔각정으로 가지 않고 성벽을 따라 숙정문 방향으로 내려갔다.

 

  곡성 아래녘에 있는 촛대바위

 

  곡성 방향에서 내려온 한양 성곽 외벽

 

  성 밖 너머로 북악 스카이 웨이 팔각정이 보였다.

 

  성 아래 삼청각과 고급 주택들이 모여있는 성북동 방향

 

  반환점인 숙정문에 도착했다.

 

  숙정문 내성

 

  숙정문 외성

 

 

  이정표를 보고 촛대바위와 만세동방 방향으로 행로를 바꿨다.

 

  북악산 안, 촛대바위 쉼터로 가는 계단

 

  쉼터에서 올려다보는 촛대바위

 

  촛대바위에서 내려온 계단길.

 

  만세동방으로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중간중간 나무계단도 끊어져 있기도 했다

 

  만세동방, 임금께서 드시고 만세를 누린다는 물이 바위를 타고 내려오다가 아랫 바위 중간에 파놓은 돌 웅덩이에 고여 있다. 한 모금하려다가 찝찝해서 그만두었다. 

 

  갈림길 이정표, 지난 번에 왔던 곳이라 지체 없이 익숙해진 백악정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청와대 담장 뒤에 있는 백악정

 

  며칠 사이 코스모스 꽃들은 다 떨어졌다. 그러기에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란 노래도 있잖나. 인생지사 참으로 허망타!

 

  칠궁 방향으로 내려가며 돌아본 북악산

 

  창의문 아래 세운 121 사태 당시, 몸으로 무장공비를 막다 희생된 당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 동상

 

  당시 순국한 종로 경찰서 정종수 경사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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