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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조선 최고의 명당 남연군 묘

 모처럼 날씨가 쾌청했다. 어젯밤에 비가 온 탓인지 티끌 먼지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집콕하기엔 너무 아까운 날이어서 외출을 감행했는데, 인적 없는 곳을 고르다 보니 덕산에 있는 남연군 묘가 생각났다. 영화 '명당'이, 이 묏자리를 두고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이 암투를 벌리는 내용이던데, 대원군은 그의 후손 두 명이 왕이 될 자리라는 풍수쟁이의 말을 듣고, 본디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이 있던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멀리 연천에서부터 184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묘자리는 왕을 배출하기는 하지만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달이 우선이었던 대원군은 기어코 아버지 남연군(1788∼1822)의 묘를 쓰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혜빈 홍씨와 정조를 낳고, 숙빈 임씨 사이에 은언군과 은신군 은진군을 두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이름은 인(裀)이다. 10세에 은언군에 봉군되었다. 1771년(영조 47) 바람직하지 않은 행실로 동생 은신군 진과 함께 관직에 기용되지 못한다는 처벌을 받고, 이어 시전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다 하여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유배되었다. 이어 동생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은신군이 17세로 귀양지에서 죽자 은언군은 1774년 풀려났다.  1776년 영조가 죽자 수릉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흥록대부가 되었다. 당시 실권자이던 홍국영이 은언군의 맏아들 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담은 홍국영과 틀어져 오히려 모반죄로 몰려 유폐되고, 1786년 독살되었다.  이 일로 은언군도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도로 옮겨져 살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도라 하여 붙잡혀 죽고, 그도 사사되었다.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원되었다.)  한편 후사 없이 제주도 유배중 17세로 죽은 은신군의 봉제사를 위해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로써 호적상 남연군은 철종의 5촌 당숙이 되고, 아들 이하응은 철종과 6촌지지간이 되었다. 

 

  묘를 이장한지 7년 후에 이하응의 차남 명복이 태어났다. 명복은 후사가 없던 철종(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손자)의 뒤를 이어 효명세자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였던 신정왕후 조대비의 지원으로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고종이다. 대원군 이하응은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섭정을 하며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일파를 숙청하고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이 장성하자, 며느리 민비와 시아버지 대원군은 세상이 다 아는 바, 외세까지 등에 업고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했다. 국가 부흥보다는 집안의 부귀권세를 중요하게 생각했었던 이들 때문에 결국 조선왕조는 망하고 말았다. 일제는 1895년 러시아를 이용하려는 민왕비를 시해하여 러시아의 조선 영향력을 무력화하였다. 그리고 종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문제삼아 고종마저 강제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순종이 1907년 7월에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3년 만에 국권을 빼앗고 말았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조선 제일의 명당 자리라는 곳에 아버지 묘를 썼으나, 그 묏자리는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게 봉분이 파헤쳐져 도굴될 뻔하였고, 이에 분노한 대원군은 서양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도굴사건에 천주교인이 가담했단 이유로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하응의 바램대로 아들과 손자를 왕위에 올랐지만, 조선 500년 왕조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연군 묘는 가야산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옛날 법당이 있던 절터는 남들과 잡풀들이 자라는 공터가 되고, 나그네들이 절터 뒷동산처럼 솟아오른 구릉에 올라 남연군의 묘를 둘러보곤 세월의 무상감을 느끼곤 떠난다. 수년 전에 이곳에 왔었을 때보다 남연군의 묘는 망가져 있었다. 금년에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봉분의 흙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을 씌웠으나, 왼쪽 옆구리와 뒤쪽의 봉분이 흘러내려 주저앉고 말았다. 봉분 뒤로는 옛적 가야사의 유적을 발굴한다고 땅을 파헤쳐 놓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더욱 볼썽 사나웠다. 코로나 사태 이후 각 곳의 유적지마다 정비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남연군 묘를 안내하는 이정표

 

  절터에서 바라본 남연군 묘, 좌우에 세운 망주석만 보였다.

 

  언덕 위 묘소로 오르는 갈 '之'자 계단

 

  통신 중계기가 서있는 곳은 가야산 가야봉

 

  남연군 묘

 

  봉분의 뒤 석문봉은 봉분 앞 덕산 가는 골짜기를 일직선으로 잇는 주봉이다. 봉분이 있는 곳이 과거 가야사 석탑이 서있던 곳이다.

 

  찢어진 그물 사이로 무너져 내린 봉분

 

  묘소 바로 뒤는 가야사 유적을 발굴한다고 땅을 파헤쳐 놓았다.

 

  왼 쪽 망주석과 묘 아래 풍경

 

  무덤 아래 본전이 있던 가야사 절터

 

  내려와서 절터에서 다시 올려다본 묘소

 

  가야봉으로 가는 길, 묘소의 오른 쪽 부분에 유적 발굴 차 쌓아놓은 흙더미

 

  묘의 오른쪽 아래 있는 상여집

 

 

 

 남연군 이구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정조의 이복 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 1771년)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숙빈 임씨의 둘째 아들이며, 은언군(철종의 조부)의 친동생이다. 은신군은 출궁 후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은 일로 탄핵당했고, 시전 상인들에게 빚을 진 것까지 드러나 제주도에 유배된 뒤 풍토병을 앓다가 17세로 병사하였다. 

 

  남연군은 1815년(순조 15) 순조의 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고, 이름을 채중에서 구로 고쳤다. 이후 수원관(守園官)으로 차출되었으나 제사 보다는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으며, 이조나 예조의 소속 관원도 아니면서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하였다. 이는 그대로 문제시되었지만 함구되다가 1816년(순조 16) 7월 13일 이이희(李履熙)로부터 탄핵을 당했으나, 순조의 배려로 무마되고 오히려 1817년 승헌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남연군 집 하인들이 일반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남연군 집의 문객인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은 허위 문서를 만들어 타인의 채권을 가로채자 1819년 형조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순조 20) 7월 21일 의녀를 잡아다가 종아리를 후려쳤다가 송상렴(宋祥濂)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7월 25일 서용의 명을 받았다. 1820년 9월 7일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9월 11일 개차되었지만 다시 9월 18일에 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정조대왕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1822년 의덕대부, 이후 1825년 1월 12일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6년 1월 선농단초헌관,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순조에게 전달하였다. 1829년 3월 영조 진종, 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

 

  1828년(순조 28)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종묘, 영녕전 춘향대제(宗廟, 永寧殿春享大祭)에 인의인헌관으로 참석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2월 22일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었는데 1822년부터는 소갈증과 신장풍으로 14년간 앓다가 1836년 3월 19일에 병사하였다. 그는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다. (김정희의 큰어머니이며 양어머니였던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36년에 죽은 후에 처음에는 경기도 마전현 미산면 백자동(연천군 미산면)에 묻혔다가 다시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南松亭, 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大稷洞) 부락)에 장사되었다. 1845년 다시 충청도 덕산 가야산 북쪽 언덕 상가리(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5-29)로 개장되었다. 아들 흥선대원군은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뒤 삼년상을 마친 이후 1846년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자락에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다.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 <위키 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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