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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종묘에서 들어간 창경궁

 종묘 북신문을 통해서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일제가 훼손한 길을 넘어 궁궐로 들어가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창경궁에 들어서면 언제나 눈시울이 뜨겁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동궐이라 부르는 이곳을 동물원과 놀이시설로 만든 간악한 술수도 모르고 복원할 때까지 창경원으로만 알고 있었던 나 자신의 무지가 한심했었다. 창경원은 그저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이 30이 넘도록 봄이면 벚꽃놀이 가고 싶고 여름이면 연못에서 보트를 타고 싶던 곳이었다. 그런 비극의 역사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심지어 방송에서도 그런 역사적 비극에 침묵했다. 오히려 봄이면 벚꽃놀이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다녀갔는지를 경쟁하듯 방송과 신문에서 앞다투어 내보냈었다. 그런데, 그러한 창경궁을 희대의 독재자 전두환이 민족정기를 되살린다고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우리 역사의 피맺힌 아이러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창덕궁 옆인 이곳에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했다. 이것이 창경궁의 시작이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난 곳이기도 하다. 성종 15년(1484)에 할머니 자성대왕대비 윤씨, 어머니 인수왕대비 한씨, 숙모 인혜왕대비 한씨를 모시기 위해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고 궁을 크게 증축 확장했다. 성종 때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해 이듬해 11월 마무리됐다. 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정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창덕궁보다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됐다.

 창경궁은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특히 1909년에는 한국통감부의 주도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 훼손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자 건설을 미루다 순종 사망 후 1932년에 도로를 신설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하였다. 현재 해당 도로는 서울시 종묘 복원 계획으로 2022년 율곡터널로 지하화하여 분리된 종묘와 창경궁을 다시 하나의 공간으로 이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관람을 폐지하고 공식 명칭을 창경궁으로 되돌렸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하고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여 오늘에 이른다. <나무위키 발췌 후 첨삭>

 

종묘 정전 뒤 북신문

 

창경궁에서 종묘로 나가는 길. 왼쪽 박스형 창구가 창경궁 매표소

 

북신문 지나 창경궁으로 나가는 길 

 

함인정 -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있어, 이곳에서 공연 등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환경전 - 함인정 뒷 건물,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 건물로 추정한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때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왼쪽 경춘전과  오른쪽 환경전

 

경춘전, 이곳은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숙종 두 번째 왕비), 헌경황후 홍씨(혜경궁, 정조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면,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통명전-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 용마루가 없는 유일한 건물이다. 현재 서쪽 연못은 물이 바짝 마른 상태로 텅 빈 상태로 남아 있다.

 

통명전 옆 양화당-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과 통명전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짐작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복헌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집복헌과 영춘헌<궁중 유적부 자료 사진> 

 

집복헌의 전시물

 

영춘헌에서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지나칠 수 없어 명정전 북쪽 회랑 문으로 들어갔다. 회랑 모서리에서 바라본 명정전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재건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었다.

 

명정전 계단의 돌조각- 쌍룡대신 봉황을 새겼다.

 

명정전 안 어좌

 

명정전 회랑과 중문, 그리고 서울대 병원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그러나 편전 외에 왕실의 장례 때 혼전(魂殿,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대에 재건하였고,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하였다.

 

숭문당

 

숭문당 부근 회랑

 

숭문당 회랑 밖 창덕궁 취운정

 

함인정

 

환경전 옆 오층석탑

 

양화당 오른쪽 계단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왔다. 아래는 양화당과 통명전 후측면과 굴뚝 

 

언덕에서 바라보는 창경궁 오른쪽 양화당과 통명전, 왼쪽 환경전 너머로 남산이 보인다. 

 

언덕을 돌아 내려 숲 그늘에서 자판기 음료수를 마시며 땀을 식힌 후, 춘당지로 갔다. 춘당지(春塘池)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뉘어 있으나 원래는 뒤쪽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후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우리나라 전통양식으로 조성하였다.

 

춘당지 뒤 대온실- 일제가 조선 궁궐 훼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다. 1909년(융희 3)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궁궐 안에 온실이 무슨 소용 있을까. 이왕지사 복원하기로 했으면 온실마저 철거하고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일제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명정문과 석교인 옥천교 -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조각했는데, 이는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옥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에서 보는 옥천교와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이 재건하였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 전각과 궁궐 시설물의 설명은 궁능 유적부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을 첨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