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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논산 개태사와 천호산

 유감스럽게도 논산지방은 대부분 그 유적지가 명확하게 밝혀진 곳이 많지 않은 듯하다. 막연하게 전설로 구전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런데, 황산벌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최후의 결전지만이 아니었다. 남북국 시대 말기 후고구려군과 후백제군의 마지막 패권도 역시 황산벌에서 결정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와 싸우던 후백제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일리천(현재 구미시) 전투에서 패하여 이곳 황산벌로 도주하였으나, 추격하는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싸울 의지를 잃고 후백제 왕 신검이 이곳 천호산 아래 주둔한 고려군 진영에서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에 왕건은 항복받은 자리에 통일을 기념하여 거국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고, 누르메 황산이란 산이름을 天護山(하늘이 보호하는 산)으로 고쳐 불렀다. 개태사는 태조 19년(936년)에 착공하여 4년 만인 23년(940년) 완공했으며, 개태(開泰)라는 절 이름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泰)를 열었다(開)'는 뜻이다. 절이 완성된 해 12월에 낙성을 기념하는 법회가 열렸는데, 이 법회에서 왕건 자신이 직접 발원문을 지어 올렸다. 개태사가 있는 곳은 황산벌에서 대전 방면으로 들어서는 협곡으로 천혜의 관문이라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다. 황산벌은 천호산 아래 들녘, 바로 그곳 연산지역이다. 

  개태사는 태조 왕건 자신이 발원문을 지은 만큼 고려 왕조 내내 왕실의 존숭을 받았고, 태조 왕건의 어진이 절에 모셔져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가 1199년 당시 동경(경주)과 명주(강릉)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진압하기에 앞서 개태사를 찾고 태조의 어진 앞에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글을 올렸으며, 공민왕 때에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야 될지 말지를 개태사에 대신을 보내서 점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 개태사의 태조 어진에 대한 제사는 공양왕 3년(1391년)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에도 있었다. 지금은 개태사에서 자체로 그린 태조 왕건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융성하던 개태사가 몰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략 때문이었다. 우왕 2년(1376년) 부여로 침범한 왜구가 공주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 개태사까지 쳐들어 올라왔고, 당시 양광도원수였던 박인계가 개태사 앞에서 벌어진 왜구와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 개태사도 왜구에게 함락되어 절이 훼손되었다. 박인계가 개태사 앞에서 왜구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영이 자청해 출정하여 홍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들을 물리쳤다. 이를 최영의 홍산대첩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은 다시 침략하여 우왕 9년(1383년)과 14년(1388년)에도 개태사에 주둔했었다. (출처: 고려사절요)

  다음으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한 몫했다. 왜구들이 파괴한 개태사는 조선시대 그대로 방치되었다.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대제학까지 지낸 성현(成俔, 1439년∼1504년)은 '개태사' <허백당시집, 권 6>에서 과거 웅대했으나 흔적만 남은 개태사를 보며 시를 지어 고려 태조 왕건을 조롱했다.


林回溪轉越橋矼 숲 사이 계곡을 돌고 돌아 돌다리를 건너니/ 罨戶花光暗似幢 문을 가린 꽃 그림자가 깃발처럼 어둑하네/
過客問程登古砌 지나는 손은 길을 물으러 섬돌을 오르는데/ 居僧紉衲坐晴牕 머무는 중은 창 앞에 앉아 가사를 깁는구나/
雲煙此日空遺跡 운연이 스쳐간 듯 오늘은 흔적만 남았지만/ 棟宇當時信少雙 큰 전각들은 당시에 참으로 둘도 없었다네/
堪笑王公眞作俑 나쁜 전례 만든 왕공(고려 태조 왕건)이 참으로 가소로워라/ 幾多苗裔信紛哤 수많은 후손들이 그 얼마나 떠들어댔던고


  또한, 우연이지만 불교에 너무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한 탓으로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에게 유폐되어 비참하게 죽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초대 황제인 무제가 세운 절에도 개태사가 있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이걸로도 비판하였다.

  또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이 절에 왔다가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  무자ㆍ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라는 시를 지었다. 정여립이 역모죄로 처형당한 뒤로 개태사가 역도들의 소굴로 여겨져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감록으로 유명한 정도령의 도읍지가 다름 아닌 개태사 자리라고 했지만 세종 때에 연산현의 현청을 개태사로 옮기려는 계획이 있었다가 개태사 자리는 현청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의가 있어서 중지되었기 때문에 한 고을의 관청 부지로도 못 쓴다고 여겨지던 곳에 계룡산이 가깝기는 하지만, 정도령이 도읍을 정할 리가 없다. (나무위키에서 일부 발췌했으나 아래 개태사 사적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개태사 사적비, 왕건의 전적과 천호산의 유래, 개태사의 윗글 역사에 대하여 국한문  혼용체로 알기 쉽게 기록하였다. 현재 개태사 위치는 세종 10년(1428년)에 옮겨진 것이며, 건물들은 1934년에 김광영이라는 스님이 개태사를 중창할 때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으로 개태사가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유물은 개태사 삼존석불이라고 불리는 석불과 5층석탑이 있다.

  개태사 사적비 前文

  태조 왕건이 반만년 역사상 초유의 민족자주통일 달성을 기념하여 세운 개태사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대 고려건국의 아이콘이었다. 영산 계룡의 남쪽 끝자락과 남동쪽에서 달려온 대둔산의 북단이 서로 만나면서 빚어낸 개태사 협곡은 진잠(대전)과 후백제의 도성 완주(전주)를 동남으로 잇는 유일무이한 통로이자 통일전쟁의 결전장인 황산벌 병목을 틀어쥐고 있는 군사전략적 요충이다. 하늘이 내린 지리의 영검 때문이었을까. 황산벌엔 신라의 백발노장 김유신이 꿈꾸었던 三韓一統의 비원이 영글고 백제의 마지막 선택 계백은 영세불망 충의보국의 사표가 되었다. 태조 23년(940) 12월 왕건은 4년여의 대역사 끝에 완공을 본 개태사 낙성 법요식에 즈음하여 친히 발원문을 지어 위로는 불력에 힘입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과 신령의 위엄에 의지하여 20개 성상에 걸친 수벽(水擘)과 화공으로 몸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천리의 남정(南征)과 동토(東討)로 몸소 창과 방패를 베개 삼아 누빈 황량한 전장의 그늘을 하늘 끝에 사무치는 개선의 노래와 지축을 흔드는 환호의 소리로 바꾸어 놓았다. 한민족 고유의 전통적 하늘사상의 발로로 누르메 황산을 천호산이라 고쳐 부르고 서기 936년 9월 건곤일척의 일리천(경북 선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한 뒤 신검이 거느리는 잔적을 쫓아 황산군(지금의 연산)에 이르러 왕건군이 처음 둔영했던 바로 그 자리에 주춧돌을 놓은 개태사는 국가가 발원한 호국국찰이자 태조의 진영을 받드는 원찰이기도 했다. 대조 왕건이 개태사를 화엄도량으로 개설한 것은 통일과 화합의 일승사상이 후삼국 통일의 의의와 상통할 뿐만 아니라 태조 자신의 신앙적 경향과 나말여초(羅末麗初)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적 추세가 함께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이 화엄의 도량으로 고승대덕들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는 발원문 글귀 그대로 의상 이후 화엄학의 대가이자 보현십원가라는 향가를 지어 국문학사 상에도 큰 업적을 남긴 균여(923~975)의 저술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고종(재위 1213~1241) 때의 승통 수기는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고종의 명으로 재조 고려대장경 교정을 붙일 만큼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정밀하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인종 조에서 오교 도승통을 지낸 징엄(1090~1141)이 주지로, 화엄학승인 영소(1115~1188)가 강주(講主)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 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조 교체기인 1391년(공양왕 3)에는 좌대언 이첨(1345~1405)을 보내 태조 영전에 제사 지내고, 옷 한 벌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비치는 등 마치 국운을 예감이라도 한 듯 바로 그 고려의 창건자가 보는 앞에서 최후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고려말(공민왕 우왕 연간) 서해안 일대에서 자행된 왜구의 침탈은 무려 378회에 이르렀는데 특히 1376년(우왕 2) 7월의 왜구는 표한하고 강성해서 피해가 극심하였다. 맨 처음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까지 진출, 정현에서 목사 김사년과 싸워 패퇴시키고 공주를 함락시킨 뒤에는 석성을 거쳐 연산현의 개태사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양광도 원수 박인계가 회덕 감무 서천복에게 구원토록 하였으나 나가지 않자 목을 베고 자신이 직접 나아가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하고 개태사도 유린당하게 된다. 이 참담한 패전을 보다 못해 60 노장 최영(1316~1388)이 출정을 자원하여 거둔 승리가 저 유명한 홍산(부여군내의 한 지명) 대첩이다. 또 1383년(우왕 9) 8월에도 왜구 1천여 명......

 

출입문인 신종루


 천호산과 개태사 전경

 

연기조사가 인도에서 모셔오신 부처님 진신사리 16과를 봉안한 오층석탑 

 

대웅전과 삼성각, 대웅보전은 근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대보전, 삼존석불을 모신 곳으로 대웅전보다 먼저 지어진 듯하다. 개태사 중건 때 본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극락대보전 안에 모신 석조여래삼존불입상, 서양의 교회에 가면 사실적으로 조각한 석상들이 위엄을 뽐내는데, 우리나라 절 안의 조각들은 그저 두리뭉실해서 사실감이 떨어진다. 신체균형도 맞지 않고 손의 모양도 크기가 맞지 않아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할 때의 것인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개태사지에서 모셔온 것이라 하니 역사성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석굴암 본존불이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서산 마애삼존불 같은 훌륭한 걸작들이 있음에도 고려를 개국하며 세운 국가원찰의 삼존불로는 아쉬운 점이 많아 보인다. 사진촬영금지 구역이나 스님께 양해를 구하고 촬영했다.  

 

 현대적으로 입체감이 살아있는 탱화, 인물들의 표정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어진전,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신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

 

단군 초상

 

대웅보전

 

삼성각과 우주정

 

무쇠솥 보호 건물 현판, 우주정(宇宙井)

 

무쇠 가마솥(철확)

 

종무소 겸 요사체

 

신종루 뒷면

 

개태사에서 나와 개사지로 지로 이동했다. 개태사 뒤로 천호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있다. 

 

개태사지, 고려 태조가 세운 호국 사찰인 만큼 규모가 불국사터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넓었다. 문화재청이나 논산시에서 하지 못한다면, 돈 되는 일엔 발 벗고 나서는 불교계에서 고려의 개국 사찰인 개태사지 유물 발굴이나 복원에 대해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경작금지 팻말 하나 박아놓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개태사지 남쪽 전망, 신축된 개태사와 연산벌 방면 

 

개태사지에서 바라보는 천호산

 

천호산으로 가는 길

 

길이 끊겼나 싶었는데, 민가 농원 옆에 흐르는 작은 계곡물 건너 좁은 산길이 보였다.

 

선녀들이 목욕하며 놀았다는 선녀탕 쉼터

 

물 떨어지는 곳 아래가 선녀탕인가 본데, 너무 작은 골짜기 웅덩이라 아마도 아기 선녀들이었나 보다. 

 

선녀탕 쉼터 오르막 굽이길의 작은 돌탑들

 

그늘진 곳은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왕건 둘레길로 가지 않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로 향했다. 역시 미끄럽다. 운동화를 신은 탓에 눈길이 미끄럽고 불편했다.

 

높지 않은 산임에도 계속 오르막 길이라 땀이 나고 숨도 찼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사람의 발자국이 없다. 짐승들 발자국뿐...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등성이 하나를 더 넘어서 정상이었다. 잡목이 적어 전망은 정상보다 이곳이 좋았다. 

 

 이윽고 정상이 보였다.

 

정상 표지목 해발 371.6m

 

산악회 리본들이 도처에 걸렸다.

 

잡목 사이로 보이는 황산성 방향

 

잡목 사이로 보이는 남쪽의 연산벌

 

되돌아 내려오면서 북쪽을 보니 계룡산이 지척이었다. 왼쪽부터 연천봉 문필봉, 가운데가 천황봉 오른쪽엔 삼불봉...

 

출발원점이었던 개태사로 돌아왔다. 개태사 안내문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러 비빈(妃嬪)들 사이에 왕자를 10여 명이나 두었다. 그중에서도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특별히 사랑해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장남 신검은 935년(견훤 44) 3월에 능환(能奐)과 두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의 권유를 받아들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킨 후, 이복동생인 금강을 죽이고 후백제 왕으로 즉위하였다.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은 이듬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과 애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금성(錦城 : 지금의 전라남도 羅州)으로 달아난 뒤 고려태조에게 귀순하였다. 태조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상부(尙父)로 모시면서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복수하고자 왕건에게 부탁하여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먼저 출병하였다. 그 뒤를 이어 왕건이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출정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 9월에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일선군(一善郡)의 일리천(一利川, 구미시 인동동)에서 큰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견훤(甄萱)이 고려군으로 참전한 것을 보고 사기가 크게 떨어져 고려군에 투항하는 병사가 속출하면서 대패하였다. 이후 신검의 후백제군은 황산벌로 패주해 황산에서 항전했으나 추격해온 고려군의 군세와 위용에 사기가 꺾여 후백제왕 신검이 이곳 천호산 아래 고려군의 진영에서 항복함으로써 후백제는 멸망하였고, 고려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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