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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공주 고마나루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며칠 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누구는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더 춥단다.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마나루터를 가보기로 했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데, 고마나루 관광지 주차장으로 안내를 했다. 주차장 가운데 세운 웅장한 웅비의 탑을 보고 주변을 돌아봤으나, 어린이 워터파크 시설뿐이었다. 주변에 공주 한옥 마을과 박물관이 있고... 하는 수 없이 지도 검색을 했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800m 정도에 곰사당이 있었다. 

  도로를 건너 잡풀이 우거지고 인적도 없는 숲 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숲길 흔적을 찾아 앞으로 나갔다. 드디어 숲길을 찾았다, 핸드폰을 보며 곰사당으로 걸었다. 소나무가 가득한 숲길 주변에 곰 조각들이 보였다. 그리고 곰사당 지붕도 나타났고...

  곰나루는 웅진(熊津)이다. 옛날엔 웅진이라 불렀다. 지금은 곰을 한자어 공(公)으로 음차하여 공주(公州)라 부른다. 백제를 세운 온조왕이 부여의 후예이고 보면, 단군 신화에 나오는 토템 신앙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부여족은 곰을 숭배했을 것이다. 내 멋대로 해석하며 곰사당을 둘러보고 큰길을 따라 나루 전망대까지 걸어 수신단을 보았다. 수신단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 갈수기로 물이 마른 고마마루를 잠시 걸었다. 곰나루... 웅진이 바로 이곳이었다.    

 

  웅비의 탑, 좌우 대칭으로 청동 향로를 세우고, 양날개 가운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을 놓았다. 아마도 공주시의 기상을 표상하고 있나 보았다. 그러나, 청동향로는 부여 왕릉원 절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고마나루 주변 안내도

 

도로 건너 곰 사당으로 가는 소나무 숲길 

 

공주의 특수성을 알리는 안내문(역사에 의하면 공산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은 배신한 공산성주에게 사로잡혀 부여 사비성으로 끌려가 소정방에게 항복한 후, 당나라로 잡혀갔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이 된 후, 1년이 못되어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양 궁궐을 버리고 이곳 공산성에 파란하여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렸다.) 

 

숲길 주변의 곰 석상

 

웅신단(곰 사당)

 

웅신단비문 - 금강의 물이 남동편으로 휘어돌고/ 여미산 올려다뵈는 한갓진 나루터/ 공주의 옛 사연 자욱하게 서린 곳/ 입에서 입으로 그냥 전하여온 애틋한 이야기/ 아득한 옛날 한 남자 큰 암곰에게 몸이 붙들리어/ 어느덧 애기까지 얻게 된다.  허나 남자는 강을 건너버리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암곰/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여긴 물살이 달라지는 곳이어서/ 배는 자주 엎어지곤 하였다./  곰의 원혼 탓일까 하고 사람들은 해마다 정성을 드렸는데/ 그 연원 멀리 백제에까지 걸친다./ 공주의 옛이름 웅진 고마나루/ 그 이름 아직 여기에 있어/ 백제 때 숨결을 남기고 있다./  공주사범대학 백제문화연구소 찬

 

웅신단(熊神壇)

 

사당 안에 모셔진 웅신(모형), 진품은 공주 박물관에 있단다.

 

웅진수신단과 나루 전망대

 

웅진수신단

 

고마나루 -> 곰나루 -> 웅진(熊津) -> 공주

 

고마나루, 유유히 흐르는 금강

 

물이 말라 강변의 진흙뻘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다. 공주보를 닫았을 때 뻘이 모래 위에 쌓였다가 마르면서 갈라져 흉칙스러웠다.

 

공주보, 정권이 바뀌자 수문을 다시 닫은 모양이다. 수문을 개방했을 때 주변 자연환경이 살아났다고 좋아했는데...

 

웅진수신단과 전망대 

 

솔숲을 지나면서 돌아본 수신단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