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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잊혀진 왕국 대가야

 잊혀진 나라, 가야.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왕국이 되었다. '가야국' 는 수없이 우리나라사람들에게 회자되지만 백제 신라 고구려처럼, 우리는 상세한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 신라에 망하면서 신라에 의해 기록들이 모두 지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에서 수백년간 융성했던 조상들의 나라였지만 후손들에게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유적들을 보기 위해 나와 특별한 연고도 없는 불원천리 고령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한 곳이 대가야박물관, 그리고 대가야왕릉전시관이었는데, 미지의 가야 역사와 문화들을 경이롭게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박물관 로비에서 대가야왕릉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어서 기꺼이 동참하였다. 대가야 수도였던 고령의 가야유적지에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가야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사시간에 배웠던 삼국시대가, 4국시대로 명명해야한다는 왕릉전시관 문화해설사님의 이야기에 수긍이 갔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각축하던 한반도의 역사, 바로 네 나라의 역사였다.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문제로 5세기경 가야국이 일본의 식민지 임나가야였었다는 문제도 풀 수 있었다. 가야 백제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가야정벌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를 정벌한 후, 점령지에 두었던 것을, 일제 사학자들이 비문을 왜곡하여 그들의 식민지 임나가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가야왕국은 한반도 남쪽에서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루던 강력한 국가였으나, 백제 고구려보다 100여년 일찍 멸망했을 뿐으로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이다. 


 어린 시절 가야는 여섯나라로 배웠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나라였다고 한다. 김해에서 시작된 금관가야부터 마지막까지 남아 신라와 싸웠던 고령의 대가야까지 경상도남중부와 전라도 남중부지방을 영토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제국이였다. 한때는 백제와 연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라와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맺으며 번성하였으나, 강대국 틈에서 국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는데, 오늘날 강력한 대륙과 해양세력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현실과 유사하다고 할 만하다. 줄을 잘 서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체성 있게 힘을 가지고 대응해야 우리 대한민국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가야박물관 입구


 박물관 내부


  왕릉 축조 과정 모형, 가운데 크고 긴 것이 왕의 묘, 주변의 작은 묘들이 순장자들의 묘이다.


 대가야 박물관 옆, 언덕 위에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 지산리 고분 44호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지산리 44호 고분은 일제강점기 이미 도굴되었으나, 고분 중심부를 제외한 주변의 32기나 되는 순장무덤은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무려 40여명을 순장한 것은 보기드문 사례라고 한다. 각 계층를 대뵤한 사람들로 농부로부터 어린 아이, 호위무사에 이르기까 왕의 무덤 주변에 순장했는데, 대부분 순장자들은 독을 마신 것으로 짐작되며, 더러는 머리에 타박상을 입은 사람도 있다고 전한다.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 순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묻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하고 끔찍한 일인가. 순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드물었을 테니 죽여서 함께 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놀라운 것은 빈 석실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왕의 운명을 알고 있던 가까운 사람들이 순장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력이 좋다지만 삶보다는 못한것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일 게다.   


으뜸돌방, 왕의 목관 위와 아래에 순장자가 함께 누웠다.


 왕의 무덤인 으뜸돌방의 구조, 벽에 등불을 밝혀 불이 꺼질 때까지 잔존 산소를 태우도록 했을 것이라 한다.


 대가야 유물로 국내에 유일하게 보관 중인 황금 왕관, 원본은 삼성재단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왕릉 전시관 밖 고분군, 경주의 왕릉 고분군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크고 작은 무덤은 엄청 많았다. 


  왼쪽이 44호 고분 


  아랫 방향, 왼쪽의 고령시가와 오른쪽 봉분군


북방 4km 인근에 있는 우륵 박물관



가야의 의미


  가야의 역사는 2천여 년 전 남쪽의 해안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에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는 흔히 육가야(六伽耶)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 문화권에서 형성, 전개되었던 나라가 6개국만은 아니었다. 일연(一然) 스님이 고려후기에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그때까지 전해진 가야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재구성한 결과 6개국으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가야 6개국이란 숫자는 일연 스님의 역사인식을 보여줄 뿐이다.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등의 문자기록과 가야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약 12개국 정도가 가야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역사를 영위했음이 확인된다. 3세기 후반까지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는 변한(弁韓), 즉 전기가야 12개국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6세기 중엽 대가야의 멸망을 서술한 일본서기562년까지 신라에 통합되었던 후기가야의 10개국을 기록하였다. 더구나 562년의 10개국에는 532년경에 신라에 병합된 남가라(南加羅, 김해), 탁기탄(啄己呑, 진영), 탁순(卓淳, 창원) 3국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처럼 가야는 성립부터 멸망 때까지 약 12개국 정도가 각각의 역사를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가야 문화의 흔적이 확인된다.


  가야 제국(加耶諸國)은 약 600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적 왕권과 영역을 유지하였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것은 강대했던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기 꼭 100년 전의 일이었다. 가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100년 먼저 망한 사실과 600년 동안이나 우리 고대사의 울타리를 구성하며 삼국과 역사를 함께 한 사실 중 어느 쪽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간단한 연대 대비와 산술 계산에서 확인되는 가야사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소홀히 다뤄왔다. 그래서 수수께끼의 가야라든가 신비의 가야라는 식으로 취급한 것이다.


  가야 제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600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역사를 영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삼국 시대라는 말에 익숙하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만의 역사로 인식할 때, 가야 제국을 비롯한 다른 고대왕국의 역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 고대사를 완전하게 복원하는 데도 문제가 있고, 600년 동안 가야의 역사가 전개되었던 고대 영남 지역의 역사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북쪽의 만주에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라는 한민족의 또 다른 고대 국가가 무려 1천 년 이상 존재하였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우리의 고대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고대사를 연구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국 시대가 아니라 부여나 가야를 모두 포함하는 열국 시대(列國時代)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필자는 전국 시대(戰國時代) 같은 명칭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대사의 범주와 성격, 그리고 시대 명칭을 새롭게 정의하는 노력도 필요하고,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차지하는 의미 또한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다.  이영식 교수 "이야기 한국고대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780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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