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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도미부인 사당

  춘향전 근원설화로 유명한 삼국사기의 도미설화. 근대에 이르러 박종화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박종화는 도미부인을 "아랑"이라 이름지었다. 이 설화는 백제시대 도미의 아내를 탐했던 개로왕과 그로부터 정조를 지켜낸 도미 아내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의 전래지를 놓고 지자체간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와 서울의 천호동, 보령의 오천면이 제각각 도미부인이 살았던 곳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고증하기 어려운 옛날 옛적 삼국시대 이야기를 현대에 이르러 자기 고장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내 소견으로는 왕으로부터 도미가 두 눈을 뽑힌 채로 뗏목에 내버려졌다는 곳이 한강유역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충청도 보령의 작은 어촌인 오천항 부근에 도미사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었다.


  기록을 찾아보면, 개로왕 시대 백제의 수도는 지금의 서울인 한성이었다.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한성공격 때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개로왕이 피살되고 한성 왕궁이 파괴되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이 웅진, 지금의 공주로 478년 천도하였고, 그 후 538년 성왕이 현재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사비 지역은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상으로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무주공산이었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서 왕권의 안정은 물론 새로운 백제국가 건설을 위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충남 오천지역은 공주와 부여가 가깝기는 하지만 뱃길로 직접 이어지는 곳은 아니다. 보령방조제가 없던 시절엔 바닷물길로 광천까지는 배들이 드나들었다. 공주와 부여로 흐르는 금강은 보령의 오천보다 훨씬 아랫녘인 장항과 군산 사이를 통과하여 서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보령시는 이곳 오천면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와 이곳의 지명을 바탕으로 1994년 도미부인의 사당을 짓고 도미부부의 허묘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도미부인 사당은 천북항에서 오천으로 가는 길에 보령방조제를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오천항 반대방향으로 간다. 동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 산길 아래 도미부인 사당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이정표를 따라 산길로 수 백 미터 오르면 오른편에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산허리를 깎아 계단을 만들고 사당을 지었다. 사당을 지은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옆에 도미 부부의 허묘까지 만든 것은 과유불급이라 하겠다. 전해지는 설화 속 인물들의 허묘까지 만든 것은 오히려 왜곡에 가깝다 하겠다. 그 허묘 옆에는 이 묘를 건립할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박아 기념비를 세웠다.

 

  각설하고, 각박한 오늘날 현실에서 절대권력과 부귀영화에 맞서 부부가 서로 신뢰하며 사랑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교훈이 될 만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인 오늘날, 부부가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한평생 신뢰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낱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할 것은 아니겠다. 눈이 하얗게 내려 사당 주변에 소복이 쌓인 이 한 겨울에 도미부부 이야기는 온고지신으로 따스하게 다가왔다.

 

  도미부인 사당 정문


다행이 사당 정문의 쪽문이 열려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도미부인 사당인 정절사


사당 안에 모셔진 도미부인 초상


인근 간척지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만들어진 도미부부의 합장묘



도미부부 합장묘역에서 내려다 본 주변 풍경, 오른쪽의 높은 산이 이 지역의 큰 산인 오서산



오천항 이웃에 있는 천북굴단지의 명물인 석화구이




  출처 : 위키백과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도미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사람 도미는 호적에 편입(編戶)된 평민으로서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그의 아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절개가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이 도미를 불러 「부녀자의 덕(德)이라는 것이 지조 굳고 행실이 깨끗함을 우선으로 한다지만, 그윽하고 어두운, 사람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고, 도미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헤아릴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저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개루왕은 그의 아내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신하를 시켜 왕의 옷을 입고 마부를 데리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한 다음, 도미의 부인에게는 따로 왕이 행차할 것이라고 알리게 했다. 왕을 가장한 신하는 그 부인에게 「나는 오랫동안 네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미와 내기하여 이겼으니 내일 너를 궁인(宮人)으로 들이기로 하였다. 이 다음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라며 동침하려 했는데, 부인은 「국왕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계집종을 꾸며 대신 방에 들여 보냈다. 

  그러나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도미에게 가짜 죄를 씌워,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홀로 작은 배에다 실어 강에 띄워 보낸 뒤, 다시 도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간음하려 했다. 부인은 「지금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보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왕의 시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향기롭게 목욕한 후에 오겠습니다.」라고 둘러댔고, 이번에도 왕은 그 말을 믿고 허락하고 말았다. 

  부인은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향해 통곡하다가 문득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서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부인은 남편 도미와 재회하였다. 다행히 도미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부부는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䔉山) 아래에 이르렀고, 고구려 사람들은 부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이후 부부는 그곳을 떠돌며 가난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열녀」로서 유교를 국시로서 강조했던 조선 시대에는 《삼강행실도》 등의 국가 편찬물에 「미처담초(彌妻啖草)」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곁들인 이야기로서 수록되어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야기의 시대 배경


 이 설화에 등장하는 왕은 개루왕이며 도미 부부의 일은 개루왕의 재위 시기로 비정되는 2세기의 일로서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도미 부부의 일은 개루왕이 아니라 개로왕(근개루왕) 때에 있었던 일로 여겨지고 있다. 1977년 《삼국사기》의 국역과 함께 주석을 달았던 이병도는 개루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대방군(帶方郡)이 있어 백제에서 고구려로 곧장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도미 부부의 일은 실제로는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렸던 21대 개로왕 때의 설화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도미 부부 설화가 개루왕 대의 사건일 수 없는 근거로는 1) 백성을 호(戶) 단위로 편재한 사실, 2) 백제의 왕을 「대왕」으로 칭할 정도로 왕권이 전제적이라는 점 등이 거론되는데, 개루왕대보다 훨씬 후대의,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진 시기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


  도미 부부 설화의 전승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위례성 및 한성의 위치와 관련해, 초기 백제의 근거지로 비정되는 지금의 서울 강동구 ·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의 한강 유역을 무대로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성도라는 섬은 오늘날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보면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동부면 창우리 앞의 팔당나루를 도미의 눈을 빼서 던진 도미나루(渡迷津)라고 지목하고 있다. 

  도미 부부가 마지막에 달아난 산산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의 삭주(朔州) 정천군(井泉郡) 산산현(䔉山縣)으로 고구려의 매시달현이었으며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 지방으로 비정된다.

하남시의 주장과는 반대로 송파구 풍납동(風納洞)의 풍납토성을 백제의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에서 지리적인 거리를 미루어 볼 때 도미진(渡迷津) 설화는 설득력이 없으며, 도미진과 두미진(斗迷津)은 같은 장소인데, 도미(都彌)와 음이 같을 뿐 상관성은 없다는 반박과 함께, 강동구 암사동의 「두무개」라는 지명은 「도미」와 음상(音相)이 똑같아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강동구에서는 2004년 3월 20일, 천호1동의 천일공원에 도미부인의 동상을 세웠다가 동상의 무게 문제로 2009년 10월 천호2동 472-2번지의 녹지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현지에 전해지는 지명 전승을 근거로 하여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는 보령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의 성주 도씨(星州都氏)는 도미를 그들 가문의 도시조(都始祖)로서 모셨는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산81-1번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도미의 무덤이라는, 「백제정승도미지묘」라는 이름까지 붙은 봉분이 있었다. 이 봉분은 2003년에 해당 지역이 임해공단 개발부지 내에 편입되는 등의 문제로 충청남도 보령시로 이장되었다.

  앞서 보령시 오천면에는 도미 부부 설화와 비슷한 내용의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미인도(美人島)」(원래 이름은 「빙도」),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원산도(怨山島)」 등 도미 설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명이 자시(自市)에 남아 있음을 근거로 보령시는 1992년 소성리(蘇城里)의 상사봉 정상에 도미 부인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정절각(貞節閣)을 만들었고, 1994년에 또 다시 도미부인의 사당인 정절사를 지어 95년부터 해마다 경모제를 올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하남시는 2009년 10월 31일에 하남문화원 주최 「제1회 도미설화 학술대회」에서 보령의 도미부인 설화를 위작으로 단정하면서 하남 지역이 근거지라고 주장, 보령시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보령시 또한 「백제 문화가 재조명되면서 이를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일부 지역의 시도가 있으나, 도미부인 설화는 이미 보령이 모든 주도권을 확보한 상태」이며, 「보령 근거설을 부정하는 측 역시 역사적인 증거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유래되고 있는 지명 등을 근거로 추측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하남문화원의 학술대회에서 제기됐던 하남시의 두미나루 유래설 역시 도미가 아니라 두물나루(한강 두 줄기가 합쳐지는 곳, 양수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 보령시 관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보령에서는 2002년 대천극단의 「도미부인」 창작극이 공연된 이후로 이렇다 할 후속 활동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B%AF%B8_%EB%B6%80%EB%B6%80_%EC%84%A4%ED%99%94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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