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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허균선생 묘

  우리나라 사람치고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작가 허균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한다. 허균은 광해군시절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관리로서 방탕한 성정으로 밥먹듯이 관직에 나갔다 쫓겨나기를 일삼다, 역모에 휘말려 능지처참된 비운의 인물이란 정도만 알아도 대단한 일이겠다. 

 

  허균의 고향인 강릉 경포해변 아래 초당마을엔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가 복원되고, 그 곁에 기념관까지 건립되어 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에도, 용인에 있는 그의 묘는 안내판 하나 없이 시골 궁벽한 야산에 내던지듯 버림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종합청사보다도 더 큰 시청사를 호기롭게 세운 용인시 당국자들은 어린 시절 홍길동전도 읽지 않은 위인들인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더구나 허균의 묘가 있는 이곳 양천허씨 묘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1968년 서울에서 이곳 용인 원삼면 맹리로 이장해 왔기에 용인시로서는 굴러온 복덩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벼뤘던 허균의 묘를 찾아 나섰다. 다음 지도에서 위치를 찾고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했으나 내 네비에서는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묘소 근처인 원삼휴게소로 목적지를 정하고 휴게소에 가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렸더니 계정과 비번을 물어왔다. 평소 쓰지 않는 핸드폰 내비게이션이라 계정 ID와 비번을 기억할 리 없었다. 더운 땡볕에 30분 정도 계정설정하느라 애쓴 끝에 로그인하고 내비게이션을 켜니, 근처에 있다는 선생의 묘소가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옆좌석에 놓고 구불구불 농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큰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찾을 수 있었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허균선생의 묘를 검색했었으나, 막상 허 씨 문중의 그 많은 묘 가운데 선생의 묘를 찾는 일이 아득하였다. 일단 초입의 천봉기념비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작정하고 답사를 시작했다.

 

묘소 입구에 있는 천봉기념비. 허씨문중의 묘를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1968년 이곳으로 이장한 내역을 기록하여 세웠다.

 

천봉기념비 뒤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허균 선생의 부친 허엽의 신도비. 비석에 새긴 글씨가 얕아 잘 보이지 않았다. 신도비의 내용은 양사언이 짓고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신도비 뒤에 있는 허균의 누나 허초희(난설헌) 시비. 1969년 국어국문학회에서 세웠다.  

 

시비 뒷면에 새겨진 5언율시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淸香終不斃(청향종불폐)//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하늘하늘 창 아래 난초/ 가지와 잎이 어찌 그리 향기로운가// 서풍에 한 번 불려 떨며/ 시들어 떨어지니 가을서리를 슬퍼하네.// 그 빼어난 빛 시들어도/ 맑은 향기는 끝내 없어지지 않아라. // 가을 서리에 시드는 난초와 그 향기에 내 가슴 아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네.

 

허난설헌 시비 뒤로 보이는 허씨문중의 묘지. 추석 뒤라 벌초를 깨끗이 했으나 배치된 봉분들이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허난설헌 시비로부터 첫 번째 묘

 

 다행히도 두 번째가 허균의 묘였다. 허균은 거열형으로 능지처참되었기에 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시신이 없는 가묘에 두 부인을 합장하였다. 묘 뒤 능선 너머 석물이 서있는 곳이 그의 부친 허엽의 묘이다.

 

제단과 비석, 봉분

 

비석에 새겨진 명문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예조판서 양주허공 위 균지묘. 정부인 안동김씨 정부인 선산김씨 부좌"

 

묘비의 측면과 뒷면의 명문

 

허균의 묘와 그 오른쪽에 있는 묘들, 역시 봉분의 관리상태가 좋지 않았다.

 

허균의 묘 뒤에서 바라본 전경, 맞은 편 비석이 양천허씨 시조 선문공을 기리는 비석이다. 깨끗하게 벌초를 했으나 잔디 상태가 엉망이라 봉분이 적묘처럼 함몰직전에 있었다. 

 

허균묘의 좌측면 전경. 농촌마을에 공장들이 이곳저곳에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허균 묘 바로 오른쪽에 있는 동복 형인 허봉의 묘. 허엽의 재취부인 소생으로 1568년(선조 1)에 생원과,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74년(선조 7)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이듬해 이조좌랑이 됐다. 1577년(선조 10)교리를 거쳐 1583년(선조 16)창원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했다. 1584년(선조 17)병조판서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하다가 종성에 유배됐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정치에 뜻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했다. 1588년(선조 21) 38세의 젊은 나이로 금강산 밑 김화현 생창역에서 죽었다. 

 

 허봉 묘 바로 오른쪽 곁에 있는 이복형 허성의 묘, 봉(篈)·균(筠)의 형이고,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정언·헌납·이조좌랑·응교·사인·집의를 거쳐,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대사성·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을 지내고 전라도안찰사로 나갔다가 예조와 병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607년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인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칭하게 되었다. 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그 우측방향으로 허균의 할아버지 허한의 묘

 

숙부인 초계변씨의 묘

 

허씨묘역 오른쪽 끝에 세운 양천허씨 시조 선문공단

 

묘역 왼쪽 능선 너머 도로 전면에 있는 묘지들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1977년에 조성된 묘역.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공의 묘. 아들의 역모죄 탓으로 비석이 칼을 맞아 두 동강난 것을 붙여 세웠다. 강릉 초당마을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기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했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그 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기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아들의 역모죄 덕에 칼 맞아 두 동강 난 허엽공의 비석

 

 허균의 어머니, 재취부인인 강릉김씨의 묘비. 봉분은 없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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