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십 년도 지난 옛날에 들렸던 제비원 석불이 생각이 나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맞추고 그곳을 찾아갔다. 통상적으로 불리는 이름은 안동 이천동 석불이다. 석불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의 지형과 딴 판이었다. 석불 아래 도로였던 곳이 넓은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기사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인지, 석불 주변이 예쁘게 단장되었다.
이곳을 방문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까마득한 과거 저편의 일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의 흐름이 점점 실감 나지 않는다. 이십 년 전 일들이 바로 어제같이 생생한데, 내 모습과 주변의 환경은 너무나 변해 있다. 앞으로 20년 후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연로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벌써 내 나이가 그때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있으니 세월이 쏜 살 같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다. 이웃에 사셨던 친척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49세에 돌아가셨으니, 그에 비하면 그분들보다도 십 년을 더 넘긴 지금의 내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석불,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이 불상은 원래 연미사(燕尾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있으며,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다. 서쪽을 향해있는 커다란 바위에 선으로 옷주름을 음각하여 만든 부처님의 몸 위에 머리를 따로 올린 형태이다.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불두(佛頭)는 큼직한 육계(부처의 정수리에 상투)를 올린 머리와 또 다른 돌로 조각한 얼굴을 조립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眉間)에는 白毫(백호)를 큼직하게 양각하여 붙이고,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이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의 윤곽선에 이어져 있다. 붉게 칠한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어서, 강한 윤곽으로 표현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작은 원이 구슬처럼 연결된 문양)을 돋을새김 한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암석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머리 부분과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거대한 자연석에 선을 대충대충 음각하여 몸통을 이루고 있다.
부처님의 몸통은 가슴을 둘러 양 어깨를 덮어 입는 부처님의 의상을 선을 파서 만들었다. 이 선(線)은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法衣)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수평으로 표현되었다. 깨달음을 두 손으로 나타내는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 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 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 밑에는 큼직한 단판 연화문을 음각하여 대좌로 삼고 있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촌동 석불로 유명한 사찰, 연미사 연미사는 경북 안동시 오도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안동은 예부터 유교적인 문화가 깊이 뿌리 박혀 왔으나 안동은 이전부터 불교문화가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안동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봉정사를 위시해 여타 지역과는 차별되는 수많은 사찰들이 산재해 있다.
연미사는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인 명덕이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연구사(燕口寺)라고 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燕子樓)라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가 제비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미사(燕尾寺), 법당이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연구사라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공원에서 바라본 석불, 석불 앞에 또 다른 자연석이 있는데, 석불과 석불 앞 바위 사이가 신도들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며 기원하는 공간이다.
석불 아래 바위 사이의 공간엔 많은 사람들이 석불을 향하여 절하며 그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석불로 돌아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절도 새로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