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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남한산성 행궁

  간밤에 벼락과 우레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엔 햇살이 쨍하게 빛났다. 가시거리도 상당해서 멀리 광교산 머리가 깨끗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조반 후 얼른 카메라를 챙겨 남한산성으로 갔다. 모란역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할 때, 인터넷 검색과 달라 약간 착오가 있었지만, 버스 앱과 정류장 안내표지를 참고해서 모란역 3번 출구에서 9번 버스를 타고 목적지 종범까지 갔다. 시내버스 노선이 구불구불해서 지체되긴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만큼 마음만은 편했다.  산성 안은 산성축제 준비로 한창 바쁜 듯, 한가운데 주차장은 차량을 통제하면서 천막들을 설치해 놓았다. 

 

  서서히 가을빛이 물들어간다. 눈부신 가을 햇살 속에 바람이 조금 찼으나, 이내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표소에 들렸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행궁 기와보수공사를 한단다. 준비했던 카메라만 무거운 짐이 되고 마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으나, 멀리 바라보는 행궁의 풍경은 공사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고즈넉했다. 

 

 

  산성 행궁은 1636년 12월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인조가 이곳에 피신하여 머물던 곳이다. 청군은 국경을 넘은 지 보름 만에 선봉대가 남한산성까지 이르러 인조를 압박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관리들과 군사들이 1만 4000여 명으로 50여 일분의 군량밖에 없었다. 해를 넘겨 정월 1일엔 청군 12만 명이 산성 아래 탄천에 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하였다.  산성에 고립된 조선군은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1월 22일에는 세자빈궁과 대신들을 피난 보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성을 나와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고두구배의 예로써 항복함으로써 두 달간의 전쟁은 끝이 나고, 왕은 정궁으로 되돌아갔다. 

 

임진왜란으로 조선 팔도 조선백성들이 왜적들에게 도륙당하고 있을 때, 임금은 의주로 몽진하여 제 목숨만 연명한 것이 불과 44년 전 일이었다. 그동안 조선군이 업신여기던 북쪽 여진족들이 임난 후 35년 만인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이어서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 팔도를 유린하였다. 임난 7년의 치욕을 망각하고 권력싸움만 일삼았던 당대의 위정자들의 우매하고 어리석은 정치 놀음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 후,  274년 후인 1910년엔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적들에게 한반도의 주권을 내주고 말았으니, 조선인들의 어리석음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듯하다. 그뿐이 아니다. 식민지국가에서 해방되어 정부가 수립된 지 3년도 못되어, 북쪽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대통령은 부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서울을 사수한다고 큰소리쳤던 대통령은 도망쳤는데, 미처 피난하지 못한 백성들만 수복될 때까지 인공치하에서 신음하며 살았다.   

 

  오늘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데, 정당들은 당리당략에 빠져 상호 비난만을 제일로 여기니, 불쌍하고 가련한 것은 우리 백성들 뿐이다. 정치가 살아야 민생이 살고 민생이 살아야 국방도 튼튼해질 것인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역사를 잊은 자 내일이 없다. 모처럼 아름다운 날에 병자호란 때 인조가 머물던 행궁을 보며,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의 정세에 기분이 씁쓸하였다.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표지

 

 행궁 가는 길가의 행궁 사진  

 

  행궁의 정문 한남루

 

  외행전

 

  외행전 뒤에 있는 내행전. 임금의 침소

 

  내행전 바로 뒤편 언덕에 지은 재덕당

 

  이위정, 재덕당 뒤측면에 있는 후원 정자. 순조 때 광주 유수가 활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재덕당 오른편의 문으로 이 명위문을 통해 이위정으로 들어간다.

 

좌측면에서 바라본 행궁

 

  

남한산성의 역사

 

남한산성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 남한산성 축성이 완료되면서 1627년 조선 정부는 광주목의 읍치를 산성 안쪽 마을인 성내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전 광주목의 중심지이자 읍치는 동부면 춘장리(현재는 하남시 춘궁동)로 재편되었으며, 항간에서는 '고골'(古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일반적인 산성은 방어가 목적이었던 것에 비해, 치소를 유치하게 된 성내동은 행정기능을 추가하여,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광주목은 광주부로 개칭되었다. 방어취락으로 시작해 새롭게 광주부의 행정중심지가 된 성내동은 남한산성 내부의 "성내"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문 밖의 일부 구역인 "외문">"을 포함하였다. 이주 초기에는 산성 안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집하였으며, 초기 이주자 중 일부는 죄를 지어 변경으로 송치할 대상도 포함되었다. 이 결과 30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계속 모집하여 숙종 대에는 600여 호가 산성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성내동은 대체로 천 가구, 4천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취락이었다. 이 인구는 남한산성 안팎의 인구를 모두 고려한 수치이며, 산성 안쪽에만 국한시키면 600여 호 남짓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7년의 조사에 따르면 성내의 호구는 446호, 1840명이었다. 이후 구한말 의병운동이 남한산성에서 일어나면서 일시적 피해를 입고, 1917년 12월 군청이 현재 광주시청이 있는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산성 안의 취락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의 보고에는 성분 안쪽의 산성리에 241 가구, 1,402명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40년대 중반 무렵 산성리는 약 70여 호의 벽촌으로 변하여 주민들의 생계마저 궁핍하게 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후 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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