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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보길도 세연정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 진작부터 고산이 살던 보길도를 찾아보려 했으나, 마음뿐이었었다. 친구 따라 진도에 갔던 길에 막간의 짬을 내어 드디어 보길도에 들렸다. 그동안 마음만 있었지 정보가 거의 없어서, 어디부터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고산이 부용동에 살았다는 흐릿한 기억에 그곳을 검색했지만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윤선도 유적지라는 원림을 찾아내곤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원림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 아침 일찍 도선하여 쉴 새 없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원림 개장 시간을 맞추기 위해 차선책으로 해안을 따라 보길도 땅끝전망대까지 가고 오면서 과거 어부사시사를 짓던 어촌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21세기 보길도 주변은 과거 조선시대 양반들이 유유자적하던 한적한 마을이 아니었다. 섬 사이에 가득 채운 각종 양식장들과 양식업을 생계로하는 수많은 어민들이 바삐 움직이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보길도 해안은 남해안의 어촌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9시가 넘어 윤선도 원림을 다시 찾았다. 세연정이 있는 원림은 바닷가가 아니었다.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어서, 윤선도가 눈앞에 펼쳐진 어촌의 풍경를 생생히 바라보며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리라는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면 예전에는 세연정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연정 현판이 북향인 바닷 쪽으로 난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있기도 하겠다. 아무튼 고산은 바닷가 풍경들을 떠올리며 한 잔 술의 풍류를 즐기면서 세연정 또는 부용동 낙선재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을 것이다. 먹고사는데 별 걱정 없는 양반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부들의 생활은 낭만적이었겠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혹한 육체노동에 가족들의 운명까지 짊어진 어부들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양반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산을 털어 이곳에 집과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던 그에겐 보길도의 자연처럼 어부들의 고된 육체적 노동도 눈에 스치는 일상적 풍경처럼 보였을 터이다. 고산은 보길도 자연 속에 어부들의 모습까지 하나로 받아들여, 양반의 풍류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진 "어부사시사"를 노래했다. 그리고, 그 "어부사시사"가 현대에도 육지인들로 하여금 보길도를 낭만적 섬으로 인식케 하고 찾아들게 하고 있다.  

 고산은 낙서재에 기거하면서 기생들을 거느리고, 원림 세연정에서 술마시며 풍류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김홍도 풍속화  "벼타작" - 돗자리 위에서 술 마시며, 다리를 꼬고 볏단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턱 괴고 담배를 피우면서, 벼 터는 농사꾼들을 지켜보는 양반. 고산의 보길도 생활은 백성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 양반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세연정이 있는 원림은 우리나라 정원을 대표하기도 한다. 뒷산에서 흘러내린 작은 시냇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반원을 그리며 휘돌아 굽이지는데, 고산은 이곳을 막아 정원을 꾸몄다. 석축으로 물길을 막아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세연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산은 부용동에서 세연정을 오가면서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갔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나목들로 둘러싸인 겨울철임에도 세연정은 자연스럽고도 몹시 정갈하고 운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세연정 앞에 초등학교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 다소 훼손되어 보이는 것이 유감이었다.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아니라도, 세연정이 있는 고산의 정원만이라도 보길도는 우리 양반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 입구

 

  매표소 뒤, 윤선도 전시실

 

  윤선도는 지독한 풍수쟁이였다. 제주로 살러 가다 들린 이곳의 지형을 보곤, 명당터라 여겨, 이곳에 눌러 앉았다고 전한다. 

 

  매표소가 있는 관리실과 전시관

 

  세연정 입구,  왼쪽으로 보길초등학교와 돌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세연정

 

  세연정 측면, 현판이 북쪽을 향했다. 

 

  남서쪽에서 바라보는 세연정

 

  세연정에서 나와 부용동으로 들어와 곡수당을 찾았다. 곡수당은 고산이 주로 휴식하던 공간으로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고 전한다. 좌측이 곡수당, 우측이 사당이다. 

 

  곡수당에서 바라보는 낙서재, 고산이 생활하며 책을 읽던 공간으로 곡수당 이웃에 있다. 고산이 이곳에서 85세로 영면하였다.

 

  산 중턱 바위 위에 고산이 지은 동천석실,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고 전한다.  

 

"어부사시사" 중 일부

춘사 4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어촌) 두어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至국悤(지국총) 至국悤(지국총) 於思臥(어사와)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나다 .

 

하사2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

닫 드러라 닫 드러라

靑蒻笠(청약립)은 써 잇노라 綠蓑衣(녹사의) 가져오나

至국悤(지국총) 至국悤(지국총) 於思臥(어사와)

無心(무심)한 白鷗(백구)난 내 좃난가 제 좃난가

 

추사 1

 

物外(믈외)예 조흔일이 漁父生涯(어부생애) 아니러냐

배 떠라 배 떠라

漁翁(어옹)을 욷디 마라 그림마다 그렷더라.

至국悤(지국총) 至국悤(지국총) 於思臥(어사와)

四時(사시)興(흥)이 한가지나 秋江(추강)이 읃듬이라

 

동사 4

 

간밤의 눈 갠 後(후)에 景物(경물)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난 萬頃琉璃(만경유리) 뒤희난 千疊玉山(천첩옥산)

至국悤(지국총) 至국悤(지국총) 於思臥(어사와)

仙界(선계)ㄴ가 佛界(불계)ㄴ가 人間(인간)이 아니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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