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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오산 독산성

 가을볕 따라 나간 독산성(세마대)이었다. 휴일이라서인지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가족들이 부쩍 많았다. 인근에 오산 세교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동탄 신도시가 생기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았다. 5 공화국 시절 대통령의 장인이 이곳에 농장을 만들고 살아서 성아래 중턱에 헬기장까지 닦였는데, 5 공화국 이후에 주차장이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세마대를 찾는 시민들에게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 옆 약수터에서는 산행 후 시원한 물맛도 볼 수도 있고...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쌀로 말을 씻어 왜적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휴일 한 때, 맑은 공기를 벗하며 수원과 화성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휴식처로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산성으로 오르며 내려다본 서남쪽 방향

 

  많은 사람들이 주로 오르내리는 독산성의 서문

 

북쪽으로 가는 길

 

  성 위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을 위해 작년 초에 성벽 아래 잡목을 모조리 베어냈지만, 성장 빠른 아카시아나무들이 벌써 웃자라 시야를 가로막기도 했다. 북쪽의 치성에서 서남쪽 방향.

 

성의 북쪽으로 수원시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광교산과 관악산이 보였다.

 

 보적사 아래 북문에서 바라보이는 동탄 신도시

 

 백제 때 창건했다는 보적사. 요즘에 들어 손 때를 많이 타서 중국제 배불뚝이 포대화상이 대웅전 계단을 지키고 있었다. 배금주의의 상징 같은 저 화상을 경쟁적으로 절에 들여, 절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스님들의 뜻이 납득되지 않는다.

 

 보적사 아래 풍경

 

동문으로 가는 길

 

 독산의 정상에 앉은 세마대, 독산성의 총 지휘소이다.

 

'세마대(洗馬坮)'란 현판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휘호.

 

동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

 

독산성의 동문

 

문짝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장마 때 무너진 것을 몇 년 전에 보수해 놓았다.

 

서문으로 돌아 나가며 돌아본 독산성의 남쪽 성벽

 

독산성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둘레 약 3,600m. 사적 제140호. 지정면적 33,997㎡. 현재 석축 약 400m가 남아 있고 4개의 성문이 있다. 일명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한다.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도성(都城)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로 중요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았던 성으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1593년(선조 26)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백성이 합심하여 수축을 하였다. 이와 같은 독산성의 예는 이웃에 모범을 보여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이어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으로까지 퍼졌다. 1595년 포루(砲樓)의 시설이 갖추어지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석차(石車)와 포차(抛車 : 투석용으로 쓰던 차)를 배치하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 35) 변응성(邊應星)이 수축하고, 1796년(정조 20) 수원성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步)이며 4문이 있었다. 그러나 물[井泉]의 부족이 대군의 주둔을 어렵게 하여, 이 산성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물의 부족은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을 낳았다. 즉,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위로 끌어올려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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