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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충주 탄금대

  충주를 지나는 길에 탄금대를 찾았다. 20년도 더 지난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으나, 기억이 가물거려 처음 온 곳처럼 모든 것이 생소해 보였다. 탄금대 공원 위로 올라가자, 탄금대 가는 길은 포장 공사중이었다. 편하지 않은 길을 타박거리며 걸어서 직진하다가 좌로 굽어진 구비에 현충탑과 위령탑을 보았다. 현충탑은 6.25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것이고, 위령비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신립장군과 그 휘하 8000 명의 고혼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신라에 귀화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궁중악을 창작했었다는 이곳 탄금대가 포악한 왜적들의 침략으로 처절한 핏빛으로 물들어 그 흔적을 좇아 오늘에 그 만행을 반추하고 있었다.

 

  탄금대 주변, 곳곳에 신립장군을 기리는 비석들이 널려 있었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던 영웅 신립 장군은 왜적을 맞아 이곳에서 배수진으로 맞서다 패전하여 순국하고 말았으나, 풍전등화의 조국을 지키려다 산화하신 그 고결한 정신은 잊혀지지 않고 오늘에 이어져 기려지고 있었다. 

 

  팔천고혼 위령탑 

 

 탄금대의 내력을 적은 탄금대기

 

탄금대-애석하게도 철근 콘크리트 2층 정자였다.

 

신립장군의 순국을 애통하여 지은 순조 때 시인 황오선생의 시 "탄금대"가 정자에 걸려 있었다. 

 

신립장군 순국지- 달천 전투에서 패한 장군은 이곳에서 강물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탄금대 아래 벼랑가

 

신라시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곳 

 

신립장군 순절비각

 

비각 안의 충정공 신립장군 순절비

 

 비각의 뒷면

 

탄금대 아래 대흥사 - 자그마한 사찰로 현판도 보이지 않았다.

 

대흥사 뒷풍경

 

탄금대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계고(階古)·만덕(萬德)을 뽑아 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 전한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申砬)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는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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