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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동묘

  황학동 벼룩시장 구경에 나섰다가 들린 곳이 벼룩시장 중심에 있는 관우의 묘당인 동묘였다. 대만에 갔을 때, 절 안에 관우를 모셔놓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차려놓고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관우님은 돈을 벌게 해주는 분이기에 재물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가득 담긴 것들이었다. 1800여 년 전 중국 후삼국시대 촉나라 장수 관우를 재물과 관련시켜 비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관우사당을 지어놓고 제를 올렸다는 것이 흥미로왔다.  대만에서는 재물복을 위하여 빌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태민안을 위해 관우님께 빌고 또 빌었겠다. 

 

 동묘 주변엔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고, 주변 골목마다 구제시장과 벼룩시장으로 인파들이 넘쳐났다.  구경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여서 길거리에 진열해 놓은 물건보다도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벼룩시장 구경 나왔던 사람들이 동묘 안에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기에 동묘는 쉼터역할을 하고 있었다. 1800년 전의 관우님이 구제시장을 찾는 서민들의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닐 터이다.  아직 겨울 끝에 머물고 있는 찬바람 덕에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쪽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오싹한 기운이 돌아 으스스한 게 몹시 추웠다.  동묘 안에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나약한 조선국왕의 무력함이 대국에 대한 눈치 때문에 동대문 밖 이곳에 관우사당까지도 짓게 되었나 보다. 건물 자체도 조선전통 방식이 아닌 중화풍으로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감돌았다.  

 

 오호, 애재라. 도대체 이 나라는 언제쯤에나 외세의 눈치 없이 큰 소리 내며 살 수 있을까나... 동묘 정문 앞 광장에는 구제품 시장이 열려 옷가지들을 바닥에 쌓아놓고 골라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가지에 1000원을 받고 있었는데, 아마도 아파트마다 의류수거함에서 가져다 파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옷더미들을 헤치며 고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곳의 풍경에 비하면 재래시장 노점에서 옷을 흥정하는 것도 사치스러워 보였다.

 

 

정문 다음의 중문- "禁雜人(금잡인)" ,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라는 돌비석이 좌우에 서 있다. 비석과 건축물의 규모로 보아 조선시대는 꽤 위력을 떨쳤나 보았다.

 

관우를 모신 사당 - 현판의 글씨가 중국식이었다.

 

 관우사당

 

사당 안내문

 

 나무창살 사이로 들여다 본 관우상- 나무창살이 조밀하여 안을 들여다보기가 어려웠다. 창살 사이에 렌즈를 바짝 대고 한 컷을 찍어 트리밍 했다. 우리가 흔히 그림에서 보던 관우의 초상과 많이 달라 보였다. 긴 수염 때문에 미염공이라 불렸던 관우의 모습이라, 그의 특징인 긴 수염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관왕으로 불리는 관우는 왕답게 일월삼봉도를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조선의 국왕은 일월오봉도 앞에 앉는데, 관우는 그보단 한 단계 격이 낮게 모셔진 듯하다.  현판엔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무안의열성제묘)의 묘라 쓰여 있어 아마도 '昭德義烈武安聖帝(소덕의열무안성제)'가 관우의 시호임을 짐작케 한다. 제라면 황제의 격일 텐데... 관우상 뒤의 일월삼봉도의 의미는?  잡스러운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사당의 건축 양식이 특이했다.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커다란 기둥들을 세워 도리를 받치고 있다.

 

 

좌측면에서 바라본 관우사당-앞 뒤 건물 두 개를 이어 붙이고 외벽을 벽돌로 쌓아만든 특이한 모양이었다. 

 

중문 하단 나무벽에 그린 그림

 

우측면 화장실 앞에서 바라본 중문과 사당, 양지녘에 노인들이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동묘-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로서, 중국의 장수인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이다. 서울 동대문 밖(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관왕묘는 선조 31년(1598)에 서울 남대문 밖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는데, 남쪽에 있다 하여 남관왕묘라고 했음. ≪증보문헌비고≫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왜란 때 관우의 혼이 나타나 때때로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 하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관왕묘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동관왕묘는 선조 33년(1600)에 명나라의 칙령으로 건립하여, 선조 35년(1602)에 준공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관왕묘(關王廟). 남관왕묘(南關王廟)라 불린다. 출처 <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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