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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유관순 기념관

  미세 먼지 때문에 망설이다 햇살이 퍼진 뒤에야 집을 나섰다. 봄날씨가 완연해서 차창을 열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아우내에 도착했더니 때마침 장날이어서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한참을 뺑뺑이 돌았다. 유명하다는 병천 순대장터에서 순댓국으로 점심을 먹고, 장마당을 한 바퀴 돌았는데, 장터의 인심들이 넉넉해 보였다. 시골답게 농기구를 비롯해서 죽제품, 과일, 간식거리, 작업복 등등...  도시 재래장터보다 물건도 많고 사람들도 흥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울긋불긋한 천막들이 도열한 좁은 샛길 사이로 세월을 주름잡아 과거로 돌아선 분위기였다.  다만, 시골 5일장도 예전과 다른 공산품들과 수입 농산물들이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어서 국제화된 시류를 외면할 수는 없나 보았다.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예전과 변화가 없어 보였다. 전시물들도 사진 중심으로 옛날과 같은 모습이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박제화된 전시물들이 안타깝다. 휴일을 맞아 많은 탐방객들이 이곳을 찾는데, 의식 속에 깨우침이 울릴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면, 감동도 더 클텐데...

 

  나라 잃은 백성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시위를 하다 부모를 잃고, 일제에 검거되어 형무소 수형 중 옥사한 어린 소녀 유관순, 의롭고도 서러운 그의 죽음은 해방 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로부터 혜택 하나 변변히 보지 못한 채, 망국의 백성이 되어 독립 시위하다 목숨을 잃고 외로운 영혼이 되어 황천을 헤매는 이름 없는 열사들이 어찌 한둘이겠고, 열사를 찬양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어둠에 묻는 자들 또한 어찌 한둘이겠는가. 열사의 유해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아, 친일파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열사의 피 끓는 행적이 우리 대한민국의 아이러니이다. 광복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지 못하고, 매국을 애국으로 뒤집는 수많은 친일의 후예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오늘날에도 독립된 주권국가에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자괴심마저 든다.  유관순 열사의 뜨거운 순국을 생각하면, 열사는 오늘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에 아마 저승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다.  그분의 영령을 위로하며, 과거를 청산 못한 쓰라림에 가슴이 아프다.  

 

  유관순 기념관 입구 열사의 거리, 조형물

 

  기념관 입구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기념관

 

  유관순 열사 추모각

 

  추모각이 있는 산 너머에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 생가 옆 매봉교회

 

  생가

 

  관리사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1919년에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한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이었다.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황도사상을 보급하던 황도학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 인사였다. 박인덕은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옥중에서 유관순에 대한 일제의 악질적인 고문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출소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일제 말기 변절하여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했고, 임전대책협력회 상무위원으로서 친일 논설과 강연에 나섰다. 아울러 전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 활동하면서 징병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인사들이 해방 이후 독립지사 유관순을 정치적 종교적 방패막이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운 친일 흔적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유관순은 서울의 3.1 독립선언 여파로 3월 10일 전국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마을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병천주민 수천 명은 1919년 4월 1일 9시경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오후 2시경 일본 헌병들이 시위군중들에 발포하여 19 명이 즉사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이때 유관순 열사 부모가 모두 즉사했고, 유관순은 복부와 머리에 칼에 찔려 부상당했으나, 아버지의 시신을 들쳐 메고 파견소에 몰려가 강력 항의하다가 천안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은 유관순에게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녀가 판결에 항의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유관순의 죄수번호는 1933번이었다.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3년을 언도했다. 그녀는 재차 형벌의 부당함을 항의했지만 9월 11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재판과 판결을 전혀 수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옥중에서 끊임없이 저항했고, 1920년 3월 1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간수들은 골칫거리 유관순을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독방에 감금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기념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형기를 3개월 남겨둔 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1937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유골이 사라졌고, 그녀의 존재 역시 세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이화여고 기념사업회에 의해서 갑자기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하였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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