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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남이장군의 묘

 조선초 풍운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손자였고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였다. 아버지 남빈은 벼슬이 군수에 그쳤으나 장인이 세조의 총신 권람이었다. 남이는 왕가의 인척으로 권문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궁궐에 출입할 때면 세종대왕으로부터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다고 전한다. 남이는 총명하고 기개가 뛰어나 17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25세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28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되어 왕가를 지키는 든든한 종친세력이 되었다.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남이를 시기한 유자광일파가 모함하여, 28세에 역신으로 몰려 졸지에 능지처참되고, 집안은 풍비박산 거들나고 말았다. 1818년(순조 18년) 관작이 복원되고 충무 시호를 하사 받았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춘천 남이섬에 있는 장군의 묘는 가짜묘이다. 남이섬의 가짜묘만 봐왔기 때문에 진짜 남이장군의 묘를 보고 싶었었다. 그런 탓에 수소문 끝에 화성시에 후손들이 남이장군을 모셨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다. 화성시 비봉에 있는 장군의 묘소로 가는 길은 한창 개발 중인 화성시답게 도로가 이리저리 뚫리고 얽혀 그리 수월한 길은 아니었다. 화성시 비봉에서 안산으로 가는 큰길에서 벗어나 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아스팔트 산길을 따라 500여 미터 올라가면 동쪽 산비탈에 작은 전원주택 마을, 그 뒷산 남쪽에 장군의 묘가 있었다. 장군 묘는 부인과 함께 있는 쌍분묘로, 후손들이 1968년에 묘역을 정비하고, 1971년에 비석을 세웠으며, 1973년 7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소재지에서 북서쪽 안산시 방향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남전리 야산에 있다. 

 

  춘천 남이섬 남이장군의 묘는 이 섬을 개발한 경춘관광의 얄팍한 상술에서 비롯된 사기놀음이다. 강원도 춘천 남이섬은 1944년 청평땜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섬으로 춘천의 남쪽에 있어서 남섬이라 불렸는데, 1965년 친일파 민영휘 손자 민병도(1916~2006)가 토지를 매입, 모래뿐인 불모지에 다양한 수종을 심어 종합 휴양지로 개발하면서 얼토당토않게 남섬에 남이장군 이야기를 도입하여 가짜 무덤을 만들면서 남이섬이라 이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1966년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 종합휴양지로 조성하여 오던 중, 2000년 4월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마을 좁은 공터에 차를 두고 이정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무덤 석물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다.

 

  솔숲 속에 자리한 장군의 묘소는 2단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작은 2단을 만들어, 남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묘를 썼다. 무덤 상석 앞에 빨간 꽃이 활짝 핀 화분도 있어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듯했다.

 

  묘소 아래 있는 전원주택들...

 

  비석 전문

 공은 의녕부원군 영상충경공 한재의 손이며 병소의랑 한경문의 제 3자인 소간공직산위 한휘(배 태종의 제4녀 정선공주)를 할아버지로 군수남빈(배 남양홍씨 현감 여공의 여)의 큰 아드님으로 1443년(세종 25년 계해)에 태어나시다. 어려서부터 용맹이 뛰어나고 기상이 남달라 세상사람들의 경탄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1459년에 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다. 공의 초배는 안동권씨 좌상 람의 따님이고 후배는 고성이씨 서윤 호연의 따님이다. 소년시에 요괴를 쫓아 급환을 구한 것이 인영이 되어 초배와 성혼했다는 전설이 있다.  1467년(세조 13년)에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부사 설징신 절도사 강효문 등을 살해하고 대거 변경을 시끄럽게 하다. 이에 놀란 조정은 구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하고 조석문 허종 강순 남이 어유소 등 제장으로 하여금 토벌케 하여 그해 8월에 이시애를 죽이고 반도를 모조리 쳐 없애니 수훈의 공은 약관 25세였다. 조정은 연달아 건주위(압록강북방)의 야인 이만주 부자를 정벌하여 흥경근처에서 이를 포살하고 서북방을 평정하니 당시의 주장은 강순이고 좌대장은 어유소 우대장은 공이다. 공이 백두산과 두만강 일대를 치달리면서 아래와 같은 시로 충심과 장지를 펴니 후세의 가동촌부까지도 읊조리지 않는 자 없다. 白頭山石은 磨刀盡이요 豆滿江波는 飮馬無로다  男兒二十에 未平國이면 後世誰稱大丈夫리오.(백두산 돌들을 칼 갈아 닳아 없애고 두만강물은 말에게 먹여 마르게 하리. 남아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아니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1468년(세조 14년)에 개선한 공을 적기공신훈 1등 의산군에 봉하고 9월에 병조판서로 발탁하니 때의 나이 26세러라. 그러다 이판 한계희가 젊고 억센 공에게 병권을 맡김은 불가하다고 참소하여 이내 해직되다. 부윤 유규의 서자 자광은 사람됨이 고약하여 평소 근척인 공의 위훈과 현달을 시기해 오던 중 이 기회를 놓칠세라 공을 중상하기에 광분하다. 그 해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19세)이 즉위하자 때마침 혜성의 출현을 흉조라 하여 물의가 분분함에 공이 새 임금의 등극을 뜻하여 옛 것은 가고 새것이 오는 상이라 말한 것을 자광이 왜곡하여 역모를 한다 하고 전일의 시 가운데 미평국을 미득국이라 날조하여 예종에게 고자질하다. 공은 혹독한 고문에도 미동치 않고 오직 유자광의 거짓을 한탄하며 26세의 청춘으로 태연히 죽음을 당하니 애석해하지 않는 자 없었다. 공모자를 추궁할 때 지난날의 전우였던 강순과 모의했노라 하자 순이 송강이 부인하는 것을 공이 말하되 내가 죄 없이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을 영상인 그대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니 그 죄 크다 하였고 마침내 조용히 형을 함께 받았다 한다. 자광은 이로써 그의 야심대로 무령군에 피봉되어 크게 출세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부자 3인이 모두 몰려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하늘이 무심치 않다 하다. 1818년(순조 18년 무인)에 공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져서 관작을 도로 주고 충무공이라 증시함과 아울러 구봉서원에 배향하여 공의 높은 충절이 다시 역사에 초연히 빛나게 되었다. 공은 자손이 없고 공의 아우 군수 한초의 후손이 봉사하다 후일에 영상 한구만이 봉분을 쌓고 사초하여 경건히 헌제하였으며 1968년 3월에 묘하의 족후 정사 영우 등이 정성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1971년 6월에 정부의 보조를 얻어 화성군수가 묘비를 세우다. 공은 실로 가족만의 훌륭하신 조상이 아니라 한 민족의 귀감이며 한 나라의 위인으로서 영원히 추모와 숭앙을 받는 희세의 명장이시다. 

                                                               1971년  6월

 

15대 재종손 상집 근찬

16대 재종손 봉우 근서

 

춘천 남이섬 :http://fallsfog.tistory.com/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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