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강줄기를 따라 남해에서 남원을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차량이 드물어 여유 있게 주변경치에 탐닉하며 운행할 수 있었다. 섬진강 나루터에 잠시 차를 세우고, 식당에 들렀더니 너무 이른 아침이라 밥 짓는 중이란다. 아침밥이 뜸 드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루터 부근을 산책하곤 재첩국을 곁들여 조반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재첩국맛이 시원하고 구수해서 입맛을 돋구웠다.
악양면을 지날 때 그냥 지나치기가 왠지 미안스러워,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을 들렸다. 수년 전 방문 때와 별 차이는 없어 보였으나, 참판댁 안에 어지럽게 붙은 영화 포스터들이 이곳이 영화의 배경촬영지로 쓰였음을 알려 주었다. 세트장을 짓느니 이곳에서 촬영하는 것이 더 그럴듯한 사실감을 주리라 싶었다. 최근에 본 군도(群盜)도 이곳에서 촬영한 모양이었다. 아예 주인공들의 의상까지 포스터를 배경으로 걸어 두었다.
언덕 위의 참판댁의 고택들을 완상 하노라니, 옛 시절 양반들의 여유 있는 생활들이 상상이 되었다. 안에서는 자연과 어울린 저택에서 풍광을 즐기고, 대문 밖에 나가서는 노비나 소작인들을 내려다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들을 수족처럼 부렸을 것이었겠다. 상전의 처분만을 바라며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굽실거려야 했던 당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 군도를 보며, 슬픈 조선말 백성들의 이야기에 몰입해야 하는데, 음악과 배우들의 대사들이 6-70년대 유행하던 마카로니 웨스턴과 같아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처했었다. 영화 중간에 백정 도치가 뜬금없이 총열이 다발로 묶인 기관총을 끌고 와서 관군들을 쏘는 장면에선 "장고"를 떠올렸다. 동학혁명 때 우리 조선 농민군들을 아작 냈던 것이 일본군이 사용했던 그런 최신식 기관총이었다고 하니, 우리 현실과 상반된 영화의 내용에 그저 픽션으로 실소할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양반들과 수령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고통이 반항으로 이어져 봉기에 이르는 내용을 마카로니 웨스턴 보듯 남의 일처럼 낄낄거리고 볼 수도 없는 우리 역사의 질곡이 가슴 아팠다.
유신시대를 거쳐, 우리 역사 이래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다고 어깨를 으쓱이는 산업화된 현대에 이르러도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와 빈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수많은 선량들과 지도자들이 더 큰 풍요와 혜택을 약속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선거철, 그때뿐이다. 언덕 위 참판댁 대문 앞에서 섬진강가 너른 들판에 푸르게 자라는 벼이삭들을 바라보며 진실로 모든 이들이 풍요로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염원하였다.
섬진강 나루
최참판댁 오르는 길
드라마 토지 세트장
최참판 댁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안내문, 살아생전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하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사랑채, 마루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문중 회의를 하는 중이란다.
평사리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참판댁 대문
대문 앞에서 내려다본 평사리들판과 그 가운데 부부송
문중회의를 한다는 사랑채 담장을 돌아 마을길로 내려섰다.
영화 '군도'의 몇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