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株館(진쥬관) 竹西樓(듁셔루) 五十川(오십쳔) 내린 믈이, 太白山(태백산) 그림재를 東海(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漢江(한강)의 木覓(목멱)의 다히고져. 王程(왕뎡)이 有限(유한)하고 風景(풍경)이 못 슬믜니, 幽懷(유회)도 하도 할샤, 客愁(객수)도 둘 듸 업다. 仙槎(션사)를 띄워 내여 斗牛(두우)로 向(향)하살가,仙人(션인)을 찾으려 丹穴(단혈)의 머므살가."
조선 선조시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죽서루를 노래한 구절이다. 그 때문에 삼척하면 죽서루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태백산 준령의 냇물이 흐르고 흘러 동해로 들어가기 직전, 크게 휘어진 한 구비 벼랑 위에 아름다운 누각을 지었다. 그 누각에서 대자연을 바라보며 풍경과 시를 즐겼던 선인들의 혜안과 풍류가 참으로 대단하다. 더우기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제멋대로 모양의 바위들을 주춧돌 삼아 기둥길이를 자연에 맞춰 지은 죽서루야말로 한국의 건축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 아름다움을 송강이 노래로 깨우쳐주니 송강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그의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정치적 행태와 권력을 위해 임금에 대한 아부만 빼면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손색이 없을 성 싶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훌륭한 시가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죽서루는 몇 번을 봐도 수려한 주변 풍경 속에 떠억하니 앉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주변환경이 어지러이 개발되어 아름답고 청정한 태백산 고봉준령들을 떠올리지 못할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었다.
죽서루로 들어가는 동문, 이젠 입장료도 받지 않고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홀로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중년의 나그네가 감회에 젖은 듯, 한 자리에서 죽서루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죽서루 서남쪽의 주춧돌과 기둥
남쪽에서 바라본 죽서루
나홀로 관람을 마치고 죽서루를 돌아 나오는 나그네처럼 나 역시 죽서루 탐방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