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00) 썸네일형 리스트형 국립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은 이전에 여러 번 방문해서 한동안 가지 않았었다. 그간의 변화가 궁금해서 오랜만에 들렸는데, 변화한 모습이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디지털 영상매체와 결합된 유물 전시가 매우 아름다웠다. 시각적 이해도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형 로비를 둘러싼 전시실 동선도 깔끔하고, 쉼터도 많아서 남녀노소 관람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전시 공간뿐만 아니라 전시기술이 놀라워서 백제의 슬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물관람에 감격했다. 주차장도 여유 있었고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경치도 아름다웠다. 또 정림사지가 근처에 있어서 연계하여 관람하기에 좋았다. 부여국립박물관 박물관 내부 원형 로비, 중앙엔 백제 시대 석조 대형 스크린을 보며 참선 따라 할 수 있는 공간 유물 전시관 불교문화전시관의 왕흥사 영상관 '.. 부여 서동공원 궁남지 연밭으로 유명한 부여 궁남지.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지만 연밭마다 연잎이 싱그럽다. 7월 6일부터 이곳에서 연꽃축제를 한다고 벌써부터 준비에 바쁘다. 백제의 마직 수도였던 부여. 유감스럽게 패전국가인 탓에 유물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백제 무왕이 땅을 파 호수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궁남지는 이름 그대로 궁궐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궁남지를 둘러싸고 왕이 되기 전, 마를 파는 총각으로 변장한 서동과 궁궐에서 쫓겨난 선화공주의 연애담이 낭만적인 전설로 이곳에 전해져,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정자를 만들었다. 정자 이름은 '포룡정' 용을 안은 정자란 뜻이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옛이야기를 생각하며 연못 주변을 산책 삼아 한 바퀴 돌았다. 다행히 날씨가 흐려 햇볕은 그리 따갑지 않았다. 궁.. 오산 맑음터 공원 인터넷 뉴스에 오산 맑음터 공원 장미꽃이 볼 만하다 해서 찾아갔는데, 기대했던 장미는 넝쿨장미로 아직 자라는 중이었다. 발로 뛰지 않은 기자에게 완전 낚이고 말았다. 하수종말처리장에 만든 공원은 부지가 매우 넓었다. 넓은 부지를 이용하여 인라인 스케이트 장, 조각 공원, 어린이 야외 수영장, 산책 코스, 캠핑장 등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서편 주차장 인근에 있는 에코리움은 생태계와 관련된 동식물들을 보여주는 체험학습장이었고, 4층의 높은 전망대는 오산의 인근 지역을 두루 조망할 수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아름답고 탐스런 장미꽃들은 보지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도보 산책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다만 주변에 공장이 많아서 소음이 심했고, 동쪽 장미터널 인근 개울에서는 악취가 올라.. 공자의 후손이 일으킨 오산 궐리사 지난 겨울에 들렸던 오산 궐리사를 녹음기에 재방문했다. 궐리사는 논산시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제 2대 궐리사 중 하나로서 1792년 정조(16)에 창건되어 사액 되었으며 대성 공자를 봉안하고 있다. 오산 궐리사는 상시 개방을 하여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살아있는 교육현장이 되고 있으나, 논산 노성면에 있는 궐리사는 사유재산이라며 상시개방을 하지 않고 지역 행사 때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드는 폐쇄된 공간이다. 이곳은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중종때 도승지, 경기 황해감사, 대사헌 등 역임)선생이 낙향하여 서재를 짓고 서재 아래 은행나무를 심은 후 북을 걸고 두드려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며,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선생 별세후 자연 폐허가 되고 은행나무 역시 말라 주었다. 200여 년이.. 석촌 호수 둘레길 잠실역 남쪽 석촌호수 주변은 아예 롯데 왕국이다. 롯데는 1960년대 '햇님이 주신 선물 롯데 껌'이란 광고카피로 해태제과와 쌍벽을 이루며 주로 껌과 과자류를 파는 제과업체였다. 1980년대 초, 우민화 정책으로 출범한 프로 야구 경기에서도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와 부산 롯데 자이언츠는 서로 맞짱 뜨는 용호상박의 라이벌이었다. 그 당시 광주사람은 롯데껌은 쳐다보지도 않고 부산 사람들도 해태껌은 결코 씹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이제 토종 기업 해태제과는 존재감조차 없어져 과자류 생산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고, 본사를 일본에 둔 롯데그룹은 제과부터 호텔, 백화점, 대형 쇼핑마켓, 건설, 유통산업에 이르기까지 거느리지 않은 영역이 없을 정도로 잘 나가는 굴지의 재벌회사가 되었다. 초창기 삼양.. 병자호란과 송파나루 삼전도비 삼전도비는 석촌호수 서호, 롯데월드 앞 모서리에 있는 비석으로서 병자호란때 조선의 항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치욕적인 비석이다. 고종은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그 치욕을 지우고자 땅 속에 묻었으나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해 1917년 다시 세웠다. 광복 후인 1956년 이를 다시 땅에 묻었으나 홍수로 흙이 쓸려나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하여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다가 2010년 본디 위치(석촌호수 안)와 가까운 현재의 이곳으로 이전하여 비각을 짓고 비석을 세워 공개하였다. 치욕적인 비석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겠다. 오랜 세월에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비석 하나 땅 속에 묻는다고 우리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전날의 강풍과 전일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 날씨가 오월의 하늘 그대로 화창했다. 예전 푸른 초원으로 목가적이었던 용주사부터 융건릉까지 아름다운 시골풍경은 주변 도시개발로 사라졌다. 도로마저 끊고 주변을 재구성하여 아파트와 상가주택, 공원을 건설함으로써 일대가 상전벽해로 변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융건릉 때문인지 신도시마다 들어서는 죽순 같은 고층 아파트는 절제했다는 것이다. 과거 고려시대와 옛 수원성의 유물이 발견되어 개발이 지체되기도 했었는데, 유물발굴은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국민을 위하는 옛 토지개발공사의 무분별한 주거지 개발의 참화가 이곳을 피해 가지 못했다. 새로 만든 도로를 통과해서 용주사에 갔는데, 초파일이 가까운 탓에 방문객들이 많았다. .. 한국 근현대사 사진 몇 점 모처럼 광화문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견학했다. 평소 접하지 못했던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를 기억하고자 핸드폰에 몇 장을 옮겼다. 예로부터 무수한 중국의 침략과 견제로 한반도에 밀려와 살며, 숱한 왜구들의 살육과 약탈을 물리치고 살아온 우리나라 반만 년의 역사가 참으로 슬프게 각인되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일제의 국권침탈과 만행이 임진, 정유란과 오버랩되어 고통스러웠다. 옛날을 잊고 더불어 잘 살아보자는 요즘의 한일관계도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는 북한과의 관계처럼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오늘날에도 침략전쟁을 일삼는 러시아의 패권주의와 세계를 무대로 일대일로를 주장하며 확장만을 꾀하는 중국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 평소 별 생각없이 일상을 보내다가도 뉴스를 보면 대륙과 해양세력이 충돌하.. 오월의 경복궁 오랜만에 광화문에 나갔다가 경복궁에 들렀다.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내국인들보다 더 많은 듯했다. 체험학습 나온 학생들도 많았고... 광화문에서 일직선으로 흥례문을 통과해서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 - 경회루 - 향원정 - 건청궁으로 돌아 나왔다. 오월의 신록과 따사로운 햇살이 걷기 좋은 날씨였다. 이따금 찾아보는 경복궁이지만 오월의 햇살 아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무하나 없는 자금성의 광대함은 없으나, 대륙의 삭막함 대신 아기자기한 숲과 단정하고 우아한 우리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껴본 하루였다. 초파일 행사 준비에 바쁜 광화문 광장 자리를 옮긴 해태와 복원한 월대 우연히 보게 된 월대 위 수문장 교대식(오후 1시) 흥례문 근정문으로 건너는 영제교와 다리를 지키는 석물 .. 훼손 119년 만에 완전 복원된 화성 행궁 수원시는 일제가 훼손됐던 수원 화성행궁을 119년 만에 완전하게 제 모습으로 복원하여 며칠 전인 4월 24일 일반에 공개했다. 수원 화성 행궁은 1789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 아래 수원읍치에 모시고 새로운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신축한 수원 화성의 관청으로 쓰였다. 임금의 행차 시 국왕과 수행원들이 사용했던 궁궐로 사용하여 조선시대 지방에 건립했던 행궁 가운데 그 규모가 제일 컸다. 정조대왕은 1789년부터 1800년까지 13차례나 화성 행궁에 머물렀으며, 특히 즉위 20년째 되던 1795년. 정조대왕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이곳에서 회갑연을 차리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크게 행궁권역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아권역을 두고 행궁 앞에 군영권역으로 나누어 건립하여 운영하.. 꽃보다 화성(華城) 동네마다 영산홍이 곱게 피었다. 바야흐로 철쭉의 계절이다. 영산홍으로 둘러 싸인 방화수류정을 보러 오랜만에 카메라를 메고 화성으로 나갔다. 장안문부터 화홍문, 방화수류정까지 나들이 삼아 걸었다. 장안문 안에서는 걸그룹의 뮤비촬영이 한창이었다. 드론을 동원해서 촬영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어깨너머로 한참동안 구경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 앞 용연 주변에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 덕에 용연 주변 잔디들이 곱게 보존되어 아름다웠다. 예전엔 탐방객들이 용연 주변 잔디에 자리를 깔고 음식물을 먹는 등 어수선했으나, 이젠 그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늦었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자유롭게 왕래하.. 논산 백제 군사박물관의 계백 장군 탑정호 출렁다리의 아쉬움에 저수지 인근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진입로 벚나무 가로수에 벚꽃이 만발하여 꽃잎이 눈처럼 날려 장관이었다. 박물관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어서 박물관 내부를 둘러 보고 나온 후, 산등성이에 올라 황산벌을 향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용맹스런 계백장군 동상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의 역사가 반도중심에 국한되지 않았을 텐데,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없다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코로나가 한창이었을 때, 박물관 내부를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전시물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보다 전시물이 많이 없어져, 과연 백제 군사박물관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박물관에 전시물이 없다는 건 박물관이 아니라는 ..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 지자체마다 출렁다리 설치가 유행이더니, 그간 시간이 흐르자 그 유행도 한물갔나 보다. 모처럼 찾아간 출렁다리에 인적이 뜸하다. 지난번 방문 때는 코로나가 극성이었음에도 출렁다리 통행료를 3000원씩 징수했었는데, 그 통행료가 없어져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국내 최장이라는 이 출렁다리를 위해 엄청난 건설비가 투입되었을 텐데, 그 비용을 어디서 회수할는지 걱정스럽다. 주변에 관광 인프라가 잘 조성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을 위해 보다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 건축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높은 산 계곡을 잇는 출렁다리는 산행을 돕는 편의 시설이지만, 고인 물 위 저수지의 출렁다리는 실용성이 없어 보인다. 휑하게 출렁다리를 건너갔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볼거리가.. 계룡산 신원사 벚꽃 벌써 벚꽃이 지기 시작한다. 아쉬움에 모처럼 화창한 날씨를 핑계 삼아 벚꽃구경에 나섰다. 계룡산 신원사 벚꽃 사진이 기억에 남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신원사로 갔다. 신원사 대웅전 마당 앞에 있는 벚꽃이 탐스럽긴 했지만 고목인데다 마당 가득 연등이 달리고 천막까지 쳐있어서 기대만큼 화려하진 않았다. 경내를 한 바퀴 산책 삼아 거닐며 오전 한 때를 보냈다. 중악단 산신각 벚꽃의 계절 한낮의 기온이 20도를 웃돌았다. 매화꽃 옆에 있는 벚나무 꽃망울이 드디어 터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꺼내 들고 봄꽃맞이 산책을 나갔다. 팝콘처럼 터졌던 목련은 시들어 축 늘어져 버렸다. 개나리꽃이 만발한 산책로를 걸으며 바라보는 산등성이에 산벚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활짝 핀 벚꽃에 감개무량해졌다. 매화와 살구꽃 벚꽃은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서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벚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로소 매화와 구별이 되었다. 매화는 꽃수술이 많으나, 벚꽃은 그 수술이 매화보다 얌전하고 단정하다. 바야흐로 이제부터 며칠은 벚꽃의 계절이다. 금년엔 흐드러진 벚꽃구경을 어디로 가야 할까. 잔뜩 궁리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봄꽃 순례 어제 오후 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맑은 날씨에 봄볕이 따습다. 오후 한때 기온이 무려 20도로 치솟았다. 오후 햇살이 좋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아파트 뜰앞 살구나무 꽃이 만발하여 눈이 부셨다. 집에 되돌아와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시 나가 동네 주변을 거닐며 봄꽃 순례길에 나섰다. 살구꽃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그제까지 보이지 않던 제비꽃이 양지바른 언덕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집 뒤 공원의 산수유꽃과 홍매화는 절정기를 맞아 건드리면 원색물이 물감처럼 주루루 흘러내릴 것만 같다. 명자나무는 아직 망울진 모습으로 때를 기다리는 중이고, 양지쪽 목련은 팝콘처럼 터지며 피고 있었다. 길가 개나리는 이제 작은 꽃잎들을 피어내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 등산길엔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 봄빛을 알렸다. .. 논산 천호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곳에 세운 사찰이다.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왕 신검으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이다. 전에 보았던 우주정(개태사 부엌에서 쓰였던 무쇠 가마솥을 보호하는 정자 모양의 집)이 있었는데, 그 사이 천막 비닐로 감싼 철확(가마솥)만 남아있고 우주정은 없어졌다. 대신 대웅보전 앞에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을 새긴 커다란 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번 방문에는 본래 개태사가 있던 개태사지와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천호산엔 올라가지 않았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황산으로 산 아래 연산벌이 바로 삼국시대 신라군과 백제군의 격전지였다. 개태사 아래 연산역 북쪽 깃대봉 아래 황산성터가 남아있다. 황산성..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으로 1634년 (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 들과 유림들이 창건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2019년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본디 현위치에 가까운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돈암서원 입구의 표지석 홍살문 산앙루 정면 -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유식을 위한 누각이다. 산앙루 후면 산앙루 이층 .. 논산 반야산 관촉사 관촉사에 갔을 때마다 비가 왔었다. 그런 연유로 모처럼 맑은 날 일부러 관촉사로 먼 길을 찾아갔다. 관촉사에 도착했을 때 정오쯤이었는데, 관촉사가 북동향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었나 보다. 일주문에서부터 따가운 남쪽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독한 역광이었다. 가능한 대로 역광을 피해 측광을 이용하려 애썼지만 대체로 사진들이 어두웠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륵전 뒤 석탑과 석등은 가림막을 쓰고 보수 중이었다. 모처럼 찾아간 곳이 보수 공사를 하게 되면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관촉사 경내 마당은 맨땅이라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매우 질척거렸다.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을 이어주는 마당길에 야자매트를 깔아 불편을 해소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엔 등산.. 화성 융건릉과 정조 효공원 요사이 며칠 동안 그야말로 북풍한설이 극성이다. 어렸을 때 주기적으로 순환되던 삼한사온이 생각난다. 추운 날이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양지녘 벽에 붙어 햇빛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 시절 손등은 왜 그리 거미줄처럼 갈라지도 터졌는지. 손 튼 데는 안티푸리민이 특효였지만, 그것도 귀해서 터진 틈으로 피딱지가 엉겨 붙어도 참으며 하릴없이 한 겨울을 넘겼다. 삼한사온이 없어진 지 오래된 오늘, 차가운 북풍이 얼굴에 부딪치니 새봄의 훈풍이 더욱 그립다. 날씨가 추운 탓에 하늘이 푸르렀다. 푸른 하늘 덕에 햇볕이 좋아 모처럼 바깥나들이로 오랜만에 융건릉을 찾았다. 몇 년 사이 주변 풍경이 많이 변했다. 용주사와 왕릉 사이에 있던 푸른 초원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흉하게 함석 울타리를 두르더니, 그 울타리가 없어지고..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지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거리에 왕궁리 유적지. 이곳도 예전에 가보긴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흘렀으니, 달라졌겠다. 역시 왕궁리 유적지 박물관이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었던 건물이 새로운 모습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전시되었던 유물들이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본 박물관 안 설비들은 멀티미디어화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것이 백제 수도가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익산 천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터라 박물관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 보았다. 직원분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왕궁리 백제 왕궁은 일종의 행궁이나 별궁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궁궐의 징표로 출토된 와당의 파편에 새겨진 글자가 '수부(首府)'.. 익산국립박물관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이동하여 주차장에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입구를 찾느라 한참이나 헤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이가 알려준 곳에 입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예전의 박물관에 갔지만, 그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인터넷 예약 후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옥상에 잔디를 덮은 기다란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이 새로 마련한 익산국립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안내도라도 세웠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박물관에서 기획전시관과 익산 미륵사지와 쌍릉 등에서 발굴된 익산 유적 전시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전시관은 훌륭했으나, 조도가 너무 낮아 글씨 읽기가 어려웠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은 내 불찰이기도 하.. 서동요 주인공으로 믿고 싶은 익산 쌍릉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하늘이 맑아 밖에 나왔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늘진 곳엔 잔설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아 익산 쌍릉으로 향했다. 예전에 두어 번 갔었으나, 그 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변화된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서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설화 속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흰 눈이 덮인 능을 바라보며 잠시 전설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내 멋대로 상상에 빠져 보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혈기왕성한 백제 청년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겨울 동학사 모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날씨도 제법 푸근해서 동학사를 찾아 걸었다. 동학사 아래 웬 모텔과 펜션, 음식점들이 그리 많은지 깊은 계곡 법당에서 중생들을 구제하실 부처님도 놀라시겠다. 산중 깊은 절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산수를 벗하며 그윽한 향연 앞에서 부처님 상호를 뵙는 것이 목적일진대, 절 아래에선 세속의 본능들을 굽고 탐하는 난장판이니, 평범한 범생이 중생으로서 불계와 속계의 공존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동학사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는 동계사가 있고, 고려말 충신 포은 야은 목은을 추모하는 삼은각과 조선초 삼촌 수양에게 시해당한 단종임금과 그를 위해 목숨 바친 사육신 생육신 등 351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한데... 시류가 이럴진대 감히 오지랖 펼 .. 대전 국립 현충원 오랜만에 들린 대전 현충원, 지난해보다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산책 삼아 눈에 익은 현충원 길을 걸었다. 간간히 묘지석 앞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쓸쓸한 겨울 날씨를 대변하고 있었다. 현충탑에 참배한 후, 말도 많고 탓도 많은 독립 유공자 묘역으로 가서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아 묵념으로 고인께 감사함을 올렸다. 그동안 적적했을 장군의 묘 주변에 독립 유공자분들이 빈자리를 메꿔 주셨다. 자신의 삶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치신 분, 그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감사드렸다. 해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암울한 시절인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이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갔던 것이 스탈린의 정책 때문에 머나먼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 화성의 늦가을 바람이 찼다. 비 내린 다음날이라 날씨가 화창하리라 예상했으나, 세고 찬 바람에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어제 비가 덜 내린 모양이다. 스산한 바람에 방문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한산한 화성 풍경이었다. 금년 가을엔 단풍잎들이 제 빛깔을 내지 못하고 시들어 곱은 손가락처럼 쪼그라들어 나무에 붙어 떨어지지 못한 채 말라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나가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까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벽 아래 희고 눈부신 갈대꽃무리들을 상상했으나, 기운 없는 햇살 탓에 갈꽃의 현실은 빛나지 않았다. 하늘의 색깔도 시선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동북쪽 하늘이 맑고 고왔다. 갈숲길을 걸으며 늦가을 한 때를 쓸쓸해 보이는 고성(古城)의 모퉁이에 머물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11월과 12월이 싫다. 낮길이.. 부여 왕릉원과 나성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승격되었나 싶다. 웅진 백제 시대 공산성 밖 송산리에 왕릉을 두었듯, 사비성 동쪽 3km 지점에 방어선인 나성(羅城)을 쌓고 성밖에 왕릉을 모셨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었는데, 이곳 능산리에선 왕릉의 주인이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곳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할 뿐이다. 부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전엔 능산리 고분들과 논 아래 습지에 갈꽃들만 무성했었는데, 그 사이 나성과 능산리 사지(寺址)가 발굴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재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긴 했다. 넓게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주차장.. 부여 부소산성의 가을 부여만큼 슬픈 도시가 있을까?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성에서 웅진으로, 63년간의 도읍지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력이 쇠할 때마다 쫓겨 다녔다. 종내 122년을 버티던 사비성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망한 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해도 헛된 말은 아니다. 부여는 여러 번 가본 곳이라 그곳의 지리가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계룡시와 논산을 경유하여 갔다. 이른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부여로 갔으니 신라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서진했던 방향과 같은 셈이었다. 논산벌은 들이 넓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옛날에는 그야말.. 이전 1 2 3 4 5 ··· 33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