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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풍기 금선정

  신문쪼가리에서 본 사진 하나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었다.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했던 금선정이었다. 공돈 얹어준다는 말에 집에 들인 쓰레기 신문은 대부분 읽지도 않고 폐기물로 바뀌는데, 우연스레 펼쳐본 지면에 금선정 사진 하나가 떠억 올라와 있었다. 이름도 생소해서 잘 외워지지 않아 폰 메모장에 적었다.

 

  깜깜한 밤길을 더듬어 풍기까지 내려왔는데, 야밤중에 금선계곡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숙소가 있을만한 풍기온천을 목적지로 전환하여 풍기읍내를 지나다가, 작은 사거리에 파출소가 보여서 차를 몰고 그리로 들어갔다. 야간 순찰을 준비하던 경찰들이 불쑥 들어온 불청객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맞았다. 하룻밤 묵을 숙박업소를 물으니 친절하게 모텔촌을 일러 주었다. 풍기가 작은 고을임에도 도시정비를 잘한 듯 다리 건너편에 모텔들을 한 곳에 모아 두었다. 경찰관들 덕분에 모텔에서 편안하게 하루 여정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아침에 기상하여 창문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길은 위험하기도 하고 사진도 좋지않을 것 같아 햇살이 퍼지길 기다렸다가 금선정으로 출발했다.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로만 알았는데, 규모가 커 보이는 동양대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퇴역한 전투기를 교문밖 받침대에 올려놓은 경북항공고등학교도 있어서 놀라웠다. 풍기읍에서 20여분 거리의 금선계곡 도로는 길이 좁아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었다. 목적지 부근 공터에 차를 세우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계곡 좌우에는 오래된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주변에는 온총 사과밭으로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계곡물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있어 물가로 내려가 상류 쪽을 바라보니, 작은 벼랑 위 반석에 정자 하나가 노송 속에 섞여 있었다.   

 

  소백산(해발 1439m) 주봉인 비로봉과 연화봉에서 흐르는 물이 이곳 금계리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정감록>에 기록된 10승지 중 1 승지에 꼽힌다고 한다.  정자가 들어선 금선계곡은 조선 중기 문신 금계 황준량(1517~1563)이 생전에 즐겨 찾던 곳이란다. 그는 1537년 생원이 된 후 1540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재임하다 1563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예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계곡 바위절벽을 찾았던 금계는 “소백 운하는 어디가 제일인가. 금선대 풍월은 스스로 무엇과도 비할 길 없구나”라며 금선계곡과 금선대의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이후 1756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송징계가 바위벽에 ‘錦仙臺(금선대)’란 글자를 새겼고, 1781년 이한일 군수가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이라 이름 붙였다. 1785년 이대영 군수는 ‘금선정’ 현판을 당시 목사였던 조윤형의 글씨를 받아 새겨 걸었다. 금선계곡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농암 이현보의 손녀사위였던 금계 황준량은 퇴계의 제자였다.  퇴계는 제자인 금계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천에서 죽자 “실성하여 길게 부르짖으며 물을 짜내듯이 늙은이의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뜩하여 목이 메이는구나”라는 제문을 지어 슬퍼했다. 금계는 퇴계보다 17년 연하였지만 7년 먼저 돌아갔다. 그는 수의마저 갖추지 못해 베를 빌려 염을 했고, 관에 의복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청빈했다. 퇴계는 이를 애석하게 여겨 제문(祭文)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行狀)을 썼다.

 

  퇴계 역시 풍기군수 시절 금선계곡을 자주 찾아 ‘신선될 재주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보네. 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客)들아, 여기 자주 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고 한다.

 

  금선정 뒤편 산중턱에는 ‘금양정사(錦陽精舍)’가 계곡을 굽어보고 앉아 있다. 이곳 역시 금계와 퇴계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금계가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금계 사후 이곳을 찾아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금선계곡의 금선정

 

  금선정 위 작은 공터에 요즘 세운듯한 정자가 하나 서 있었다. 철 늦은 이 가을, 잡초 솟은 정자마당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가족들이 두집이나 있었다. 밤 사이 춥지는 않았을는지 염려스럽기도 했다. 좁은 길로 타박타박 내려오는 길에 비닐 타는 냄새가 몹시 역했다.  민가에서 쓰레기를 태우는데, 매캐한 냄새가 계곡에 퍼지고 있어서 수려한 풍경을 보고 난 감동이 한순간에 가시었다.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는 농가에서 비닐을 태우는 것도 일상의 하나이겠으나 모처럼 명승지를 찾았던 나그네로서는 뒷맛이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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