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있어 대전에 내려갔던 길에 동학사를 찾았다. 70년대 후반 겨울에 갑사에서 산을 넘어 이곳을 지났던 적이 있었다. 가랑비를 맞으며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홀로 산을 넘을 때, 어찌나 외롭고 쓸쓸하던지 다시는 홀로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카메라를 친구 삼다 보니, 오히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의 진수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표현하려고 궁리하면서, 제법 자연의 풍광을 음미할 줄도 알게 되었다.
계룡산 남쪽 계곡을 따라 길게 가람을 배치한 동학사는 신라 때 창건된 절로 현재는 마곡사의 말사이다. 동학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충신들의 충절을 기린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때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는 초혼 제사를 지내고, 조선 태조 때 야은 길재가 이곳에 단을 쌓고 공민왕의 초혼제와 포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또, 조선 세조 때엔 김시습이 이곳을 찾아 초혼단을 쌓고 통곡하며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다. 이후 단종과 사육신 생육신 등 351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 유서 깊은 사당이 있는 곳이다. 625 때 불타 없어졌으나 1960년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기억하던 70년대 모습은 아득하다. 계곡 따라 즐비한 덩치 큰 암자들을 보니 세속의 때가 너무 깊이 들어온 듯싶다. 옛 기억을 더듬어 사육신의 숨결을 느껴보며 그들을 추모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숙모전이 있는 인재문 옆이 공사 중이었다. 직원분에게 문의했더니 제사 때 외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하릴없이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을을 맞는 계룡산의 깊고 맑은 계곡을 보면서, 주차장에서 동학사까지 기인 골짜기를 물소리를 길동무삼아 오전 한 때를 보냈다. 옛날 소박했던 풍경들이 사라져 버린 조금은 쓸쓸한 동학사 골짜기였다.
동학사 가는 골짜기
절 입구 일주문 앞에 세워진 홍살문,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 까지 충신의 혼을 달래며 기리는 특별한 사찰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일주문 뒤에 있는 무명 작가의 조각들, 설명 푯말이라도 있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마도 유신독재 시절쯤 세워진 게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해 보았다. 부근에 자연보호헌장비가 아직도 있었다.
꽃과 꽃잎이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상사화 일종인 꽃무릇
관음암, 암자의 규모를 뛰어넘는 상당한 절집이었다.
길상암
미타암, 이름만 암자였지 그 규모가 매우 컸다. 금물까지 박은 현판을 보니 천박한 자본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골짜기 가에 정자가 보여 운치를 더했다.
이름하여 세진정, 세속의 먼지를 모두 씻으라는 의미인가 보다. 문득 순천 선암사 길에 있는 강선루와 승선교가 생각났다. 참고했으면 좋을 뻔했겠다.
인재문과 범종루, 범종루 아래 판매점이 들어서 있었다. 주로 불교 용품이었는데, 일부 세속적 잡화도 보여서 절의 품격을 해치고 있는 듯...
이른바 동학 삼사. 충신들을 모신 사당,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
굳게 잠긴 인재문, 인재문 안에 숙모전이 있다. 숙모전에는 단종과 단종비, 사육신, 생육신 등 89위의 위폐가 모셔져 있으며 숙모회는 해마다 단종 탄신일(음력 3월15일)과 단종 승하일(음력 10월24일)에 맞춰 제례를 올려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제사 때만 개방한다.
삼은각과 동계사, 숙모재가 있는 곳이다.
삼은각(포은 야은 목은)과 동계사(신라 때 왜에 볼모로 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죽은 박제상)가 있어서 옛 충신들의 절개를 기리고 있었다.
동학삼사 서편에 줄지어 서있는 동학사, 안내문 뒤의 건물은 종무소
대웅전 서편의 삼성각 조사전과 강원,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라 발치에서 구경만 했다.
동학사 끝 건물인 강설전, 승가대학으로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듯... 담을 높게 쌓아 올려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저 이쉬울 뿐이었다.
이곳이 반환점인 셈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대웅전 표지석과 범종루
이른바 동학사 옛길, 내려올 땐 올라갔던 길 골짜기 건너인 옛길을 걸었다. 골짜기 건너에서 바라본 세진정
부도탑
골짜기 아래 상가촌, 재개발을 하려는 듯, 오늘의 코로나 사태처럼 을씨년스럽고 흉물스럽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