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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대전 현충원 홍범도 장군의 묘

 금년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서 78년 만에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암울했던 시기 일제에 맞서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홍범도 장군은 1935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거주 조선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1943년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운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홍장군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고생하다 귀국하여 대한민국에 터를 잡고 사는 고려인들처럼, 이제 홍장군의 유해도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 귀환하여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겨울 날씨가 돼버렸다. 다행한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아 햇볕이 제법 따스했다. 홍장군의 묘역을 쉽게 찾을 수 없어 현충원 직원에게 길을 물었으나, 왼쪽으로 가라고만 해서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안내표지 하나 없어 결국 지나쳤던 곳을 다시 찾는 꼴이 되었다. 독립유공자 3 묘역이란 인터넷 기사만 보고 찾아갔었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샅샅이 찾아볼 생각으로, 찬찬히 살펴보니, 주차장 바로 위에 묘소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가까운 거리에 친일파들의 묘가 있다. 백선엽 같은 이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관동군으로서 독립군을 토벌하러 다니던 간도특설대 장교였는데, 6 25 때 전공이 있어 대장으로 승진한 사람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모셔온 분을 독립군 토벌대 출신 백선엽 묘역 가까이 안장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순덩어리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치부하기엔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위안을 삼는다면 충남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인근 홍성에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님, 예산에 윤봉길 의사의 생가가 있어 홍장군님의 혼백이라도 그들과 서로 만나 교감하며 영면하시길 빌어 본다.      

 

대전현충원 입구

 

안보 전시장, 현역에서 퇴역한 전투기와 전차, 야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직도 영공수호에 힘쓰고 있는 F-5  

 

팬텀 F-4

 

625때 한국군에 인도되어 용맹을 떨치던 세이버 전투기

 

현충문 입구의 거대한 홍살문

 

호국 분수대와 조각

 

현충문과 현충탑

 

겨레정

 

한반도 모양의 현충지

 

독립유공자 3 묘역에 모신 장군의 묘

 

대전 현충원 묘역

 

  홍범도 장군의 생애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5세 때 나이를 17세로 속이고 평양 진위대 나팔수로 3년간 복무했다고 전한다. 군에서 나온 그는 황해도에서 일꾼 노릇을 하다가 임금을 받지 못하자 주인을 때려눕히고 외금강 신계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때 신충사 비구니 이옥녀와 열애 끝에 처가인 북청으로 가던 중 원산에서 이옥녀를 탈취당했다고. 다시 인생의 방향을 잃고 유랑생활을 하다 사냥꾼을 만나 태백산 밀림에서 수렵생활을 했다. 그 사이 동학농민항쟁이 실패하면서 전봉준이 처형되고, 이듬해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자, 원수를 갚고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의병 생활 중 7년 만에 원산에서 잃었던 이옥녀를 북청에서 다시 만나 7년 만에 가정을 꾸렸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그는 포수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다. 일제는 홍범도 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잡아들여 아내에게 남편을 귀순하게 하는 편지를 쓰라고 협박했으나 굴하지 않아 고문 학대하여, 아내 이옥녀는 구류소에서 죽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제와 싸우다 전사하였고 둘째 아들은 살인범으로 몰려 고문으로 연해주에서 사망했다. 외톨이가 된 그는 1908년 탄약을 구하고자 연해주로 들어갔으나 여의치 않았다. 기미독립운동 후 안도현 명월진에서 종래의 의병과 포수 4천여 명을 모아 대한독립군을 정식 창설하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을 이끌고 혜산진과 갑산의 일본군을 습격했다. 이어 백두산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 연안인 자성, 강계, 만포진, 회령 등지에 있는 일본 군영과 경찰관서를 공격했다. 이즈음에 와서는 병력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군은 독군부(督軍府)의 독립군과 연합하여 북로 제1군 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일본군은 대대 병력으로 몇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홍범도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지금의 중국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 골짜기)을 전면 공격했다. 당시 독립군은 400여 명, 일본군은 남양 수비대 병력 등 300여 명이었다. 1920년 6월 7일 이 골짜기에서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 적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이었고, 독립군은 15~16명의 전사자만을 냈던 대승리였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소수의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로 우수한 화기를 지닌 일본군을 공략했다. 이때 독립군 총병력은 1,950명, 일본군 총병력은 7,000여 명이었다.  6일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은 패주하였다. 일본군 피해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전사자 1천254 명이었으며 부상자를 합하면 인명피해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200여 명이었다.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청산리 대첩으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주도로 승리한 전투였다.

  그 뒤 홍장군의 독립군부대는 일제의 대공세를 피해 소련 ·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현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새로이 단일조직인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을 때, 그는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를 맡았다. 홍장군은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김좌진, 안무, 최진동 등 군사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새로이 북로군정서 등과 합동작전을 펴기로 했다. 1920년 초기, 북로군정서에서는 소련에 사람을 보내, 멘셰비키 당국과 교섭하여 기관총 등 무기를 입수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독군부 사령관 홍범도는 일본군의 공격에 합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북간도 일대의 우리 동포들을 마구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이 경신 대참변으로 3천5백여 명의 동포가 참살을 당했으며 체포된 숫자는 5천여 명, 50여 개 학교가 불에 타 사라졌다. 독립군은 그 근거지를 러시아 땅 흑하(黑河, 자유시)로 옮겼다. 당시 레닌의 적군은 한국독립군에 협조적이었으나 일본군이 침공해 와서 항의를 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볼셰비키는 일본군이 철수 조건으로 한국독립군의 해산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자,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무조건 요구했다. 소비에트 공산군은 강제로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반대하는 독립군을 공격해 사망자 46명 등의 피해를 냈다. 이로써 일본군에 대한 무력투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때 내부의 갈등까지 유발되었는데 홍장군은 중립을 지켰다.

  이 때문에 김좌진, 이청천 등은 다시 만주로 나왔고, 홍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러시아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레닌당 당원으로 레닌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극동 인민대표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장군도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비에트 정보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혼한 아내와 함께 여생을 꾸려 나갔다. 그는 집단농장 관리인 일도 하고 극장의 경비원 일도 맡아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동포의 집에 유숙할 때 하루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 동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이라 한다. 

 

  그는 1943년 10월 중앙아시아의 크슬오르다에서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의 묘 앞에 동상을 세우고 그 아래 사적을 기록해 두었다. 그곳의 고려인 동포들은 설날이나 기일에 어김없이 그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여 홍범도 장군을 기렸다. 그리고 2021년 8월 15일 그가 꿈으로 그리던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첨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