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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주 여행

 천년 신라의 수도 경주, 도처가 유적지이니 경주시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만하다. 이곳저곳 산재해 있는 왕릉들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았던 유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는데, 탈해왕릉은 포항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에 있어서 길가의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었다. 전설로 전하는 석탈해왕의 무덤이 현존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탈해왕릉 위에는 경주이씨 시조가 태어났다는 표암이 있었고, 그 아래엔 시조 알평공 경모비와 사당이 있어 신비로움을 더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관람하고 보문단지에서 1박 후 아침식사까지 마치고, 경주시내로 나왔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으나, 예전에 갔었던 김유신 장군 묘와 첨성대가 생각이 나서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우연히 탈해왕릉처럼 이정표를 보고 분황사에 들렸다. 분황사는 내 생전에 처음이었는데, 아내가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 와서 본 곳이라고 매우 좋아했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나 역시 첨성대를 보고 싶었던 것이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모습이 어른거려서였으니까... 그때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첨성대 주변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엉성한 철조망 가에 예쁘게 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모습이 눈에 삼삼하게 아른거렸다. 

 

  분황사에 들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청해서 들었다. 듣는 손님들이 많지 않아 미안했지만 그 덕에 분황사의 내력과 규모를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좁은 담장에 갇혀 있지만 신라시대에는 그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절로 이곳에 원효대사가 머물렀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현재 경기도 화성의 당성부근의 산에서 잠들었다가 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로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그 바가지가 해골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모든 진리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와 국내에서 공부에 전념하여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 세우 고 당시 귀족 중심의 불교를 대중화하여 해동종을 창시하였다.

 

  고려시대 숙종이 원효를 기리기 위해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며 이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우물가에 받침대만 남아 있다.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후기에 추사 김정희가 찾아서 ‘차신라화쟁국사비적’이라 새겨놓았는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또 분황사 3층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서 쌓은 모전석탑으로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이라 추정하며 1층에는 각 방향으로 문을 만들고 안으로 감실을 만들어 놓았다. 감실을 지키고 있는 인왕상은 모두 모양이 다른데 7세기경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석탑을 지키며 서 있는 네 귀퉁이의 돌사자도 세월의 풍상에 문드러지긴 했지만, 당당하게 네 귀퉁이에 앉아 3층탑을 지키고 있었다.    

 

 분황사 앞 너른 들은 황룡사지였다. 산책하며 두루 돌아볼 수 있도록 공원처럼 단장했는데, 과거 이 자리에 황룡사 금당과 9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황룡사 9층목탑은 지금의 아파트 25층 정도의 높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고려 때 침략해 온 몽고군이 불을 질렀는데 한 달 동안이나 불탔다고 한다.  현대의 기술로도 그 높이의 목탑건설은 어렵다고 한다. 그 시절 건축기술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황룡사지에서 동편으로 대릉원을 지나 가면, 김유신 장군묘이다. 예전엔 주변에 불이 난 탓으로 나무들이 훼손되어 장군묘소 옆을 가로지른 철로의 기차소리가 귀에 거슬렸었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져 철로는 보이지 않았고 기차소리도 숲에 가려 크게 들리지는 않았다. 지맥을 끊기 위해 철로를 낸 일제의 간악한 행위가 밉기도 하지만 해방 후 70여 년이 되는 현재까지 바로잡지 않는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실태도 한심해 보인다. 그 아래 있는 태종 무열왕릉은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 같은데, 왕릉 아래 기찻길도 기찻길이지만 태종 무열왕과 그의 아들 김인문의 묘사이를 일제가 큰길로 갈라놓았다. 그런데, 자랑스러운 이 땅의 후손들은 그 길을 더욱 넓혀 더 큰 대로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릉원 안의 천마총은 천마의 그림이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이름하였는데,  얼마 전 적외선으로 천마도를 찍었더니 사진에 머리 부분에 뿔이 두 개가 보였단다. 그래서 천마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발굴된 그림은 말안장 밑에 늘여내려 진흙이 튀는 것을 막아주는 천에 그린 것인데, 자작나무 껍질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그린 그림이다.  천마총 내부에 모조품을 걸어 관람을 돕고 있었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도 죽은 이를 위해 만든 것이란 주장도 있어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 수 없으니, 고고학자들의 깊은 연구와 규명이 필요할 것 같다.

 

  경주 남산에도 다시 가보고 싶고, 선덕여왕릉이나, 박물관, 안압지도 가고 싶었지만 시간 때문에 돌아보지 못했다. 경주를 제대로 즐기려면 한 달 이상은 머물며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1. 석탈해왕릉, 숭신전, 표암, 경주이씨 시조 경모비

 

탈해왕릉 - 왕릉치고 봉분이 높지 않아 철저하게 고증되었는지 모르겠다.

 

표암과 경주이씨 시조 탄생지

 

경주이씨 시조위 알평 경모비

 

숭신전-탈해왕 사당

 

 

2. 분황사

분황사 입구

 

분황사 모전 3층석탑

 

원효대사 공덕비- 비신은 소실되고 받침만 남았다.

 

비석 받침에 추사 김정희가 새긴 명문

 

  돌우물인 석정과 보광전. 석정은 바위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施設)을 해 만든 우물이다. 신라시대의 유물로, 벽체(壁體)를 둥글게 쌓아 올리고 외부는 8각으로 다듬었다. 이런 형태는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圓融)의 의미를 지닌다.  돌우물은 호국룡(護國龍) 변어정(變魚井)이라고 불리며,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분황사의 이 우물과 서라벌 동북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의 동천사(東泉寺)에 있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두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때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3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루 뒤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그가 가지고 가던 물고기를 되찾아서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한다. 

 

보광전

 

3. 황룡사지

 

황룡사지 안내도

 

황룡사 9층목탑지

 

황룡사지 석물

 

4.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묘는 신라 문무왕 때  축조되었다.  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묘란 비석이 세워졌고,  흥덕왕(興德王) 대에 이르러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하였다.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十二方位) 주석(柱石)에 12 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 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김유신 묘로 들어가는 흥무문

 

태태각각 김유신이란 비명이 새겨져 있다.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이란 비명으로 사후 왕으로 추대되어, 김유신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5. 첨성대

 

첨성대 지역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6. 대릉원과 천마총

 

천마총

 

천마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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