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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병자호란과 송파나루 삼전도비

 삼전도비는 석촌호수 서호, 롯데월드 앞 모서리에 있는 비석으로서 병자호란때 조선의 항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치욕적인 비석이다. 고종은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그 치욕을 지우고자 땅 속에 묻었으나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해 1917년 다시 세웠다.  

 광복 후인 1956년 이를 다시 땅에 묻었으나 홍수로 흙이 쓸려나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하여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다가 2010년 본디 위치(석촌호수 안)와 가까운 현재의 이곳으로 이전하여 비각을 짓고 비석을 세워 공개하였다. 치욕적인 비석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겠다. 오랜 세월에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비석 하나 땅 속에 묻는다고 우리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것이 치욕스러운 이 삼전도 비석이다. 

 임진 정유왜란 7년의 교훈을 잊고 북방의 여진족에게 침략당한 1627년 정묘호란은 30년 만에 되풀이된 참상이었고, 6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은 전쟁 발발 14일 만에 한양 도성을 함락당하는 치욕적인 조선왕조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한 왜적들에게 그 후  270년 만에 조선은 국권마저 빼앗기고 백성은 망국민이 되어 일제의 노예로 전락하여 36년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핍박받으며 살았다. 게다가 광복 후 수립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와 야합하여 거창하게 북진통일을 외쳤으나 정부 수립 후 3년이 못되어 북한군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 넘겨주었다. 미국 주도의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을 되찾고 휴전하였지만 이승만 정부는 각종 불법을 저지르며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그 후에도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18년 독재, 전두환의 철권통치들을 겪으며 험한 현대사를 겪어왔다.   

 역사는 반복된다.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우리 한반도의 정세도 위태로워 보인다. 러시아의 우크라아 침략으로 부상한 우리나라 방위산업이 호황을 보인다고 들떠있지만,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이나 날로 세력을 확장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패권세력에 맞서 우리나라의 운명을 우리가 지킬 수 있도록 과거를 상기하며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안내문


삼전도비와 비각

 

오른 쪽의 귀부는 처음 제작한 것으로 청나라의 트집으로 왼 편의 귀부로 대체하였다.

 

비석의 정면

 

후면

 

 병자호란과 삼전도비

 청태종은 몸소 1636년 12월 2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한양에 육박했다.

 14일 인조는 김상용(金尙容) 등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하고, 자신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소식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남한산성 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 · 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한양에 입성한 후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 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 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리기도 했으나, 성밖의 조선군은 청군에게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난한산성에서 조선군의 저항은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 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옹성전 40여 일 만에 더 버틸 수 없던 인조는 1월 30일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와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의 예로 항복을 함으로써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는 인조가 항복을 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청태종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다. 


 병자호란은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으로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다음'에서 발췌 

 

 

 

관련 글 :  https://fallsfog.tistory.com/457

 

송파나루공원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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