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곳에 왔을 땐 저녁 무렵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이 컷었기에 들뜬 마음으로 경내로 들어섰다. 입장료는 1000원, 홍살문 안쪽으로 행사용 무대를 만들고 있어 움직이는 일손들이 매우 바빠보였다. 생각보다 넓은 경내에 볼거리들이 많아서 오랫동안 머물렀었다. 숲이 우거지고, 앉아서 쉴 곳이 많아서, 바쁜 일상 속에 머리를 식히기로 최적의 장소인 듯 싶었다. 전주는 전주이씨의 관향이다. 조선왕조가 전주를 성역화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런 까닭으로 경사스런 터란 뜻의 경기전을 조성하여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그뿐만 아니라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조경묘를 세우고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만들어 왕조의 정신적 기반을 이곳에 두었다.
풍문에 의하면 북한 김일성이 전주김씨인데, 그의 시조묘가 전주 인근의 모악산에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이곳 전주를 점령했을 때, 이곳의 털끝 하나조차 훼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않았으나, 볼거리가 많았고, 조선왕조의 발생지가 되는 이 땅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도 느낄 수 있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다면 더욱 웅장하고 대단했을 것이란 안타까움이 남았다.
경기전은 조선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 유적들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이곳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여기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는데,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강점기에 이곳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nbsp; 전주사고는 1439년 설치된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장소다. 한양, 충주, 성주의 사고와 함께 한 권씩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유일한 실록은 14개월 만에 조정에 전달되어 다시 한양,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다. 전주사고의 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입구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어진 봉안실
태조 이성계 어진- 진본이 아닌 모사본이라 다소 아쉽다.
내삼문에서 바라본 어진 봉안실
내삼문 출구 쪽에서 바라본 어진실과 좌우 회랑
내삼문에서 바라본 외삼문
어진실 옆의 부속채
어진실 우측에 있는 전주 사고
사고 안 전시물
세종실록과 성종실록
어진실 뒤편에 있는 어진 박물관
어진 박물관 안의 태조 어진
우로부터 세종, 영조, 정조의 어진
우로부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전시물
복도에 걸려 있는 이성계의 왜구토벌을 기록한 황산대첩도 - 이성계는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