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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초가을 경복궁, 복원된 취향교

   광화문 앞 광장이 달라졌다.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광장 왼쪽으로 나무를 심은 커다란 돌화분도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필요할 때 시위 방지용으로 쉽게 옮길 수도 있다는 말도 있어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듬직하게 광화문을 지키고 계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했다. 18년 독재자 박정희가 세운 장군의 동상은 개선의 여지가 많음에도 반세기 이상을 그 자리에 우뚝 서 오늘도 부릅뜨신 눈으로 세종로를 지키고 있다.  오른손으로 잡은 장검과 중국 장수의 갑옷, 거북선 아래 엎어 놓은 북 등, 수많은 오류가 지적되고 있음에도 무심한 세월은 호국의 신 충무공 곁을 비껴서 지나간다.   

 

 

 

 

민족의 성군이신 세종대왕 상, 오늘도 어리석게 살아가는 이 땅의 위정자들과 감언이설에 눈 먼 어엿븐 백성들을 굽어살펴주시길 간절하게 바래 본다. 

 

광화문 앞이 파헤쳐져 있다. 박물관쪽 의정부 터도 가림막에 둘러 쌓여 오늘도 공사 중이다. 기왕지사 일을 벌인다면 경복궁 담장에서 분리되어 외로운 섬처럼 서있는 동십자각도 본디의 모습대로 경복궁 담장에 이어 붙였으면 좋겠다. 

 

코로나 방역 마스크를 쓴 채, 뙤약볕 아래 광화문을 지키는 수위 군사들...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한복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난다.  

 

천추전과 나랏님 집무실인 사정전

 

나랏님의 침소였던 강녕전

 

나랏님 부인의 침소인 교태전

 

교태전 후원

 

교태전 후원을 둘러보고 경회루 방향으로 동선을 바꾸었다.

 

그동안, 다리 공사를 끝낸 향원정

 

향원정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다리를 본디 있었던 자리에 복원시킨 취향교가 고종 임금님의 건청궁과  맞닿아 있다.

 

건청궁

 

장안당

 

을미사변의 희생자, 고종 임금의 비였던 명성왕후 민씨의 거소였던 옥호루

 

  건천궁 동편에 있는 자선당 유구,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건물이 불탄 뒤, 자선당의 기단은 불에 그을린 채 오쿠라 호텔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가 1970년대엔 정원석으로 쓰였다. 1993년 김정동 목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반환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95년 12월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 동편에 보존하고 있다. 한동안 공개하지 않았으나 2012년 11월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였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조선 초, 중기엔 정전 근정전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편전인 사정전의 동쪽에 있다.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사정전 동쪽에 있는 동궁의 처소, 자선당.

 

팔우정과 집옥재, 협길당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요사이엔 한 번 나가면 재입장이 불가하단다. 청와대 개방 이후 바뀐 풍속도인 듯... 나가기가 아쉬웠지만, 광복 이후 이땅에서 절대 권력을 누려왔던 통치자들이 살았던 청와대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